Haven [단편] (by. HEART)

Haven[단편]
HEART

BGM을 꼭 재생시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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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ven: 안식처, 피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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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날 꺼내 준 건, 너였다.





1.


초등학생 때 나는, 흔한 또래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항상 나에겐 운전 기사가 있었다.
학교를 갈 때도, 학원을 갈 때도, 집으로 돌아갈 때도.
나는 절대 걷는 법이 없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부모님께 말씀 드리면 그만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방 안에 있는 전화기를 들어 말만 하면 됐다.
그러면 아주머니들이 늘 금방 가지고 올라 오시니까.
나한테는 내 방이 없었다.
내 층은 있었지,
우리 집 건물 4층은 내 층이었다.

부모님은 자주 티비에 나오셨다. 물론 신문에도.
모든 사람들이 부모님을 알았고, 그게 난 아무렇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아주어릴 때부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중학생 때 나는, 3년 내내 런던에서 살았다.
내가 11살 때 부모님께서,
ㅇㅇ아, 외국에서 영어 공부 하다 올래?라고 물으시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영어 공부 하러 가는 거지 뭐.

그 무렵부터 쇼핑을 즐겨 하기 시작했다.
딱히 옷이나 가방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예쁜 게 보이면 그냥 샀다.





고등학생 때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어 봤다.
엄마를 잃었다.
아빠는, 사고로 돌아가셨어,라고 하시더라.

엄마가 죽고 한 달 후,
하나 밖에 없던 언니가 자살을 했다.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셔서 힘들었나봐,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나를 가만히 보며 말씀하셨다,
너는 정말 너희 엄마는 하나도 안 닮고..
나를 쏙 빼닯았구나,라고.

한국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은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더라.
내가 가만히 있으면, 늘 먼저 다가와 내게 말을 걸곤 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내게 잘해줬다.





대학생 때 나는,구질구질하게 살기 시작했다.
집이 가난해졌거든.
, 물론 내 기준 구질구질하다는 거지,
여전히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생활이었다.

아빠는 술을 자주 마셨다.
그리고 늘 중얼거리셨다,이렇게 끝날 순 없어,라고.

내게 쩔쩔매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를 투명인간인 것 마냥 무시하기 시작했다.
나를 깔보기 시작했고, 대놓고 나를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매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회사를 비췄다.
MS그룹, 이대로 침몰?
MS그룹의 몰락.
전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면,
이 때부턴 누가 알아볼까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고등학교 때 나와 친해졌던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를 알은 체 하지 않기 시작했다.
학교 안을 지나가는 내게 손을 흔들어 주는 건,
이제 단 한 명도 없었다.





졸업 후 나는, 곧바로 아빠의 회사로 들어 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아빠 회사에서 일하게 될 거란 걸.
그렇기에 특별한 목표 없이 쭉 살았고,
당연하다는 듯 졸업과 동시에 출근을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깨달았다.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엿같구나,
구질구질하구나 이제, 우리 집.
일어설 방법이라고는 없구나.

다른 사람들에게 쩔쩔매며 살기 시작했다.
힘 하나 들이지 않아도 원하는 것들을 얻고,
사람들을 부렸던 나인데
지긋지긋하고 구차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한 칸 씩, 한 칸 씩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남에게 빌빌대며, 눈치껏 기었다.
혹시나 비위를 상하게 할까 전전긍긍했고,
사소한 것에 기분나빠 할까봐 몇 번이고 생각한 다음 말하고, 행동했다.





2.


아빠가 물었다.
ㅇㅇ아, 이런 생활 지긋지긋하지 않니?
, 지겨워요.
우리를 도와 주신다는 분이 계셔.
정말요?
, 그런데 대가가 필요해.
뭔데요?
.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차기 디오그룹 회장이 될 그 남자와 결혼만 한다면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갈 거라고 하더라.
알겠다고 했다, 결혼이 뭐 대수인가.
어렸을 때부터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결혼 따윈 꿈도 꾸지 않았다.



무력해진 우리 집이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에게 딱 하나 밖에 주어지지 않은 동아줄이었다.
그렇기에 그게 멀쩡한 동아줄인지,
아니면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썩은 동아줄인지 살펴 보지도 않고
곧바로 덥석 붙잡았다.
구차한 삶을 살고 있는 내게 남자는,
그저 비상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깜깜한 사방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있는 초록색 출구.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곧 약혼식을 올렸고,
온갖 미디어에 나와 남자의 사진이 떠다녔고,
회사는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모든 게 안정되고 나서,
남자와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신혼여행이라 불리는 것을 갔다.
일주일 남짓 간 그 여행 기간 동안,
나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방은 두 개 였으며,
남자는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 박혀 일을 했고,
나는 경호원들을 데리고 혼자 여행을 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남자의 얼굴을 봤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남자가 물어봤다.
내일부터 회사 나갈 거예요?
...그걸 왜 물어 보세요?
나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요.
어떻게 그래요.
내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요.
...
, 이혼하자는 것만 빼고.
...
못 믿겠어요?
...안 나갈래요.
회사에 별로 미련이 없나 봐요.
어차피 회장은, 남동생이 될텐데요 뭐.
회장 말고도 가질 수 있는 자리는 많잖아요, 사장이라던가,
저는 꼭대기가 아니면 관심 없어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그럼 그렇게 해요,라고 남자가 답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정말 회사를 나가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이 나가지 않았지만, 휴대폰은 조용했다.
아무도 나를 찾는 사람이 없더라, 심지어 아빠도.
어떠한 공식적인, 그리고 비공식적인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디어는 조용했고, 연락오는 사람도 하나 없더라.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몰랐지만,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남자의 말을 덥석 물었던 건,
과거에서부터 단절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를 깔아 보던 그 시선들이,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눈웃음 칠 것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처졌다.
마치 그랬던 내가 생각날 것만 같아서.

그리고 뭐든지 영원할 순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
지금 잠깐은 남자의 힘으로 회사가 돌아 왔지만,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 모르는 게 현실이니까.
그렇기에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되어,
편안히 남자가 만들어 준 안식처 안에서만 지내고 싶었다.





3.


남자를 보는 건, 일주일에 불과 한두 번이었다.
아무 것도 해야 하는 게 없었던 나는,
혼자 방 안에 틀어 박혀
뉴스를 보고, 책을 읽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글쓰기라는 새로운 취미도 가졌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간혹 남자가 일찍 퇴근을 하고,
또 내가 그 시간에 1층에 있을 때만 마주칠 수 있었으며,
그건 일주일에 고작 한두 번이었다.
나를 마주치면, 남자는 늘 미소 지으며내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버리곤 했다.
한 달에 남자를 마주하는 시간이,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같이 산 지,무려 반 년 정도나 지났을 무렵에.
넓은 집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남자에게만 표정이란 게 있어서 그랬는지,
남자가 내 곁에 있는 것들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이라 느껴졌다.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결혼을 하고, 그 대가로 회사를 살려줘 놓고는
내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심지어 관심도 없는 것 같은 남자에 호기심이 생겼다.

남자에게 멋대로 굴 순 없었다.
우리 회사를 원위치로 돌려 놓은 게 남자였듯,
우리 집을 망하게 하고, 나를 다시 그 생활로 돌려보내는 것도
남자에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니까.
그래서 남자가 거슬려 하지 않게, 혼자 가만히 남자를 관찰했다.

남자를 보려고 마음 먹으니,
남자와 자주 마주치는 건 하나도 어렵지가 않았다.
그냥 밤 늦게, 집 안 사람들이 다들 별관으로 가 잠에 들었을 때
책 하나를 쥐고 1층에 내려가 읽고 있으면 되었다.

거의 매일을, 남자와 잠깐씩 마주쳤다.
그리고, 여태껏 반 년도 넘게 같이 살아 놓고,
이제야 남자가 종종 여자 향수 냄새를 묻히고 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일주일쯤 되자, 남자가 내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왜 요즘 여기서 책 읽고 있어요?
그냥, 1층이 제일 시원해서요.
층 바꿔줄까요?
..아니요, 그냥 밤에 잠깐 책만 여기서 읽으려고요.
알겠어요, 잘 자요.
, 잘 자요.

다음날 밤, 어김없이 1층에 내려갔다가
한 쪽 구석에 자리 잡은 책꽂이를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으로 가득 차 있더라.
그리고, 선물,이라고 정갈하게 두 글자가 쓰인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책꽂이 바로 옆에는,
평소에 가장 좋아하던 화가인 르누아르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사 준 책 중 하나를 뽑아 들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읽다 보니 어느새 한 권을 끝냈고,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닫혀 있던 남자의 방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걸 보니,
남자가 집에 왔지만 내가 책에 빠져 있어 듣지 못한 듯 했다.
항상 집에 오면 방문을 닫는 남자인데, 왜 열어 놓고 있을까.
호기심에 끌려 처음으로 남자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문 틈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안경을 낀 채로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더라.
안경을 낀 남자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혹시 들킬까 싶어 발걸음을 뒤로하려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해요, 거기서.
.. 그냥 방문이 열려있길래요.

그리고 남자에게 물어봤다.
왜 오늘은 방문 열어 놨어요?
오늘은 저 못 봤잖아요, 혹시 보고 싶으면 보라고.
그리곤 마치 다 안다는 듯 씩 미소를 짓는다.

남자는 곧, 노트북을 치우고 안경을 벗고는
일어나 내게로 느릿하게 다가왔다.
책 다 읽었어요?
.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그러게요.
선물은 마음에 들어요?
,, 감사해요.
그래서 제 선물은요?
...?

남자의 말에 당황하자, 피식 웃으며,
그냥 한 말이에요, 대가를 바라고 준 건 아니에요,라는 남자다.
..저 마음에 들어서 결혼하자고 하셨다구요.
, 그랬죠.
그런데 왜 저한테 관심이 없으세요?
관심이 없으면, 제가 선물을 줬겠어요?
..왜 저한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세요?
그런 것 같아요?
.
바라는 거 있어요, 나랑 이혼하지 않는 거.
..그게 전부에요?

내게 천천히 다가오던 남자는,
어느새 나와 한발짝 거리에 서 있다.
이 날은, 남자에게서 종종 나던
여자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원래 호기심이 많아요?라고 남자가 물었다.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아요.
그리곤 잠시 생각하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뭔가에 잘 끌리지도 않아요,
라고 덧붙였다.

, 그런데 간혹 하나에 꽂히면.. 계속 파고드는 것 같아요.
..잘 질려요?
.. 아뇨, 그래도 다들 시들해지긴 하더라고요.

잘 질리냐는 남자의 말에, 잠깐 생각에 빠졌다 대답했다.
살면서 무언가에 꽂혔던 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여섯살 때피아노에 꽂혀서는, 그 뒤로 10년을 내리 배웠다.
열여섯살 때는 르누아르의 그림 하나를 보고 꽂혀서, 수십점을 샀지.
열아홉살 때는같은 반이었던 아이를 좋아해,4년간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스물 여섯인 지금,


요즘은 그 쪽한테 관심이 가네요, 자꾸


또 내가 새로운 것에 관심이 생긴 것 같다.


”..무언가에 빠지면 어떤데요?”

그냥, 그게 제 인생 최대 관심사가 되는 거죠

사람한테 꽂히기도 해요?”

, 전에도 한 번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요


내 말을 듣더니,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나른하게 뒷목을 매만지는 남자다.


그럼 어떤데요, 그 사람이 최우선이 되는 거에요?”

아뇨, 최우선은 저죠


내 대답에,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는 남자다.


이것 저것 많이 재는 스타일이에요?”

”..아뇨, 저는 늘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편이에요

좋네요





4.


그날 밤, 나는 남자의 방에서 잤다.
눈을 뜨니 정오였고,
저녁에 봐요,라는 남자의 쪽지가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 욕조에 물을 받고 목욕을 했다.
그리고 이른 시간부터 아래층으로 내려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퇴근하기도 전에 남자는,
본인이 말한 대로 저녁에 집으로 들어 왔다.
그리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며, 웃으며 물었다.
저녁 먹었어요?
.
저한텐 안 물어 보네요.
..뭐라 불러야 할 지 몰라서요.

내 말에 남자는 넥타이를 풀더니,
집안 사람들에게 나가라는 사인을 줬다.
그리곤 가방을 내려놓고, 내 옆에 느릿하게 앉으며 말했다.
맞네요, 우리 아직 호칭 정리도 안 했네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제 나이도 몰랐어요?
...
나이는 같아요, 편하게 경수씨,라고 불러요.
..그럼 경수씨도 제 이름 부르세요.
그렇게 해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제 침대에서 책 읽을래요?라는 남자다.
.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앉아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남자는 욕실로 들어가 씻고는, 가운을 걸치고 나와
내 옆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일을 하던 그가 내게 말했다.
ㅇㅇ씨, 일은 안 하고 싶어요?
..그럴 줄 알았는데, 글 쓰고, 책 읽고, 영화 보는 게 재밌어서요.
집에서 안 심심해요?
, 저것만 해도 하루가 모자라요.
일하고 싶으면 말해요, 아무 때나.
...

다음 날 아침에 역시 남자의 방에서 눈을 떠보니,
바깥에 있던 책꽂이와 그림이
어느새 남자의 방 안으로 옮겨져 있었다.

밤이 되고, 남자의 방에서 영화를 보던 중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셔츠 단추를 풀며 남자가 물었다.
아침에 책꽂이 옮기는 것 때문에 깨진 않았어요?
, 저 원래 소리에 잘 안 깨요.
내 대답에, 그런 것 같았어요,라며 남자가 웃었다.
책꽂이 왜 옮겼어요?
이제 여기서 책 읽으라구요.





5.


남자의 방에서 자기 시작한 이후로,
남자에게선 단 한 번도 여자 향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우린 서로에게 무언가를 묻지도, 바라지도 않았으며,
딱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몇 달 간 지냈다.

그런 관계에 균열이 생긴 건 금방이었다.
의심이라는 싹이, 곧균열을 만들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남자가 없는 아침을 맞고는
남자의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나왔다.
무심코 방 안을 한 번 둘러 보다,
늘 남자의 방 한 구석에 자리하던 커다란 모니터에 시선이 갔다.
먼지가 앉아 있는 걸 보고 손을 들어 테두리를 한 번 쓸자
실수로 버튼을 눌렀는지 갑자기 모니터가 켜졌고,
집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는 화면들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남자의 방과 욕실을 제외한, 모든 곳을 비추고 있었다.
심지어 내 욕실까지도.
현관에 있는 CCTV말고는 카메라를 단 한 대도 본 적이 없는데..

소름이 돋아, 남자와 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방에서 잠을 자면, 그걸 남자가 다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옆에서 잠을 청했다.
유일하게 여기가, 녹화가 되지 않는 장소니까.

다음 날, 남자가 없는 틈을 타 조심스럽게 남자의 방을 뒤졌다.
내 통화기록,문자메시지 기록들,
심지어 내 주변인의 신상까지 낱낱이 적혀 있는 파일이 있더라.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다시 꽂으며,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 밤, 어김없이 여덟 시쯤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모니터와 파일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럼 뒷일을 장담할 수 없다는 걸.
평소처럼 남자와 함께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엔, 눈을 뜨니 남자가 내 옆에 비스듬히 누워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오늘은 출근 안 하려구요

”..그래도 돼요?”

나는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돼요


피식 웃더니, 남자가 내게 말했다.


나는 항상 메시지,신상정보, 통화기록 순으로 꽂아 놔요

”...?”

뭐든지 가나다순으로 파일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남자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순서가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아무 생각없이 나란히 꽂혀 있던 세 파일을,
그대로 제자리에 꽂아 놓기만 했다.
어떻게 할까요, 없던 일이라 치고 넘어가 줄까요,
아니면... 왜 저런 게 있는지 다 말해 줄까요.
ㅇㅇ씨가 하자는 대로 할게요.

남자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없던 일이라 치고 넘어간다면, 그냥 평소처럼 지내면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없던 일이 될 순 없다,
이미 내 기억엔 모든 게 너무나 선명하니까.
다 듣는 걸 택하는 것 역시 두렵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 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뒤에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도.
하지만..그렇다고 그냥 넘어 가기엔, 그대로 지낼 자신이 없다.

입술을 깨물고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던 나는 곧 대답을 했고,
남자는 예상했던 대로네요,라며 나를 향해 웃었다.





6.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 온다.
오늘도 안 심심했어요?
..., .
왜 나를 불편해해요, 그 날부터.
....안 불편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두 달 전에 선택권을 주지 말 걸 그랬네요.
....?
그냥 반대로 할 걸 그랬다, 나는 그 편이 더 끌렸는데.

남자에게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번을, 아니 수백번을 했다.
하지만 뭐든지 할 수 있는 남자기에,
내 모든 걸 감시하고 있는 남자기에
나는 여전히 남자의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
.
.

※만든이 : HEART님

<>

여러분은 무슨 선택을 했을까요!
그것은 상상력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어떤 선택을 했고, 그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중편할까 고민하다,
.. 모르겠다,하고 단편으로 지르는 글..

의중지인 때부터 상상에 맡기는 거에 맛 들렸네요 흐흐
열린 결말을 쓰는 재미..
게시글 읽는 게 재밌더라구요
독자분들마다 생각도,해석도 달라서 좋고!
물론 제가 생각한 ㅇㅇ이의 선택과 결과가 있긴 하지만...

수습은.. 모르겠다 도망쳐야지 총총

바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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