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의 우산 [단편] (by. 비또)

 
어반자카파 그때의 나, 그때의 우리
반복재생하며 읽어주세요.


 
 
.
.
 
 
머리카락 사이사이 느껴지는 찬바람.
손톱부터 흐릿하게 내려오는 파래진 피부.
살짝 보이는 시린 발목.
얇은 종이를 들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다.
 
 
“......”
 
 
내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이다.
아직 못 해본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너무 많다.
결혼은 커녕,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는데.
살면서,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어본 적도 없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엄마도 그렇게 가셨다.
의사도, 간호사도 모르는 유전병이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난 오래 못 살거라고,
혼자 남겨진 나를 보며 친척들도 그렇게 말했다.
 
 
“......”
 
 
근데, 내 나이는 고작 스물다섯이다.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난 여름이 오기 전에 죽는다.
 
 
.
.
 
 
내 이름과 처음 보는 단어들이 적힌
종이를 꾸깃꾸깃 접어
벤치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시린 두 손을 꼭 잡고 멍하니 앉아
고개를 떨궜다.
 
 
너무 짧네....”
 
 
좀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즐겁게 웃기도 하고 싶었는데.
너무 짧아.
그 감정을 느끼기엔, 너무 짧아.
 
바람에 엉키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옆에 누군가 앉아있다.
 
 
“......”
 
 

 
“......”
 
 
나처럼 어딜 보고 있는 건지
모를 눈을 하고 앉아있다.
이 병원 환자인지, 환자복을 입은 남자 옆엔
링거대가 높이 서있다.
 
벌써 겨울이 온 듯 하다.
해는 빨리 저물기 시작하고,
옆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시린 공기가 덜 차갑게 느껴진다.
 
계속 여기 있음 뭐해,
병원 앞에서 시간을 한참 보내고
그제야 집으로 가려던 순간,
 
 

 
 
“......”
 
 
. .
콧잔등에 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니
점점 더 떨어지는 빗방울들.
급하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해 벤치에서
일어나 병원 건물 밑으로 들어갔다.
 
 

 
“......”
 
 
우산 없는 사람들이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
가만히 앉아있는 뒷모습이 눈에 띈다.
비가 오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아까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서 비를 맞고 있다.
 
 
“......”
 
 
소나기 덕에 더 쌀쌀한 공기.
비에 젖어가는 환자복.
그 옆에서 바람을 맞으며
달그락 소리를 내는 링거대.
남자의 머리카락 끝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저기요.”
 
 
결국 손을 머리위에
펼치고 빗 속으로 뛰어들었다.
 
 

 
“......”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입을 꾹 닫은 채 쳐다보기만 한다.
 
귀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빗소리와 빗물,
옷 사이로 느껴지는 시린 공기,
속눈썹에 매달린 빗방울 사이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
 
 
왜 그러고 있어요.
분명 이 별 거 아닌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 속에서 비만 맞고 있는 꼴이 돼버렸다.
저 눈동자 속 내가,
이 남자의 얼굴이,
너무 닮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비는 차츰차츰 사그라들고 있다.
 
 
.
.
 
 
괜찮은데...”
 
 
남자가 건네는 자판기 커피를
두 손으로 받았다.
그 따뜻함이 손바닥에 스며든다.
 
 

 
추울텐데 이거라도 마셔야죠.”
 
“......”
 
 
소나기가 그치고 병원으로 들어온 남자는
내게 커피라도 한잔 하고 가라며,
병원 구석 테이블로 날 데려왔다.
 
얇은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몸은 말라보였다.
한심하게도 그 모습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나도 곧 저렇게 되는 건가? 였다.
 
 
“......”
 
 
침을 삼키는 소리도,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종이컵만 위아래로 움직이며
눈을 깜빡였다.
 
어디가 아픈걸까.
나처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아니, 이건 너무 미안한 질문인 것 같다.
 
 

 
병문안 오신거에요?”
 
 
침묵 속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눈이 잠깐 마주쳤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저었다.
 
 
아뇨, ... 아파서요.”
 
....”
 
 
, 라는 짧은 대답소리와 함께
또 침묵이 이어진다.
어디가 아프신데요?
라는 말이라도 할까, 조금 두려웠다가
안심을 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오늘 죄송했어요.
저 때문에 감기 걸리실 거 같은데.”
 
, 아니에요. 괜찮아요.”
 
 
남자는 링거대를 잡고 한걸음 움직였다.
 
 
그럼.. 들어가세요.”
 
 
남자는 내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곤 병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뇨, ... 아파서요.”
 
 
“......”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아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병원은, 의사는, 내가 아프다고 말한다.
그 아픔이 차라리 느껴졌으면 좋겠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처럼,
살고싶다라는 생각이 들 틈도 없이 아플테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죽지는 않을테니까.
 
 
.
.
.
 
 
겨우 붙잡고 있던 일을 그만뒀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알람소리도 없이
느긋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지만,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겉옷 하나를 들었다.
냉장고에는 물 밖에 없었다.
 
밖은 추웠고, 햇볕은 따뜻했다.
겉옷 주머니에 양 손을 넣고
멍하니 슈퍼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밥을 먹을까, 라면을 먹을까.
괜히 고민하는 척 마트 안을 살폈다.
 
 
......!”
 
 
의미 없는 고민 끝에 산
라면과 반찬거리 몇 개를
봉투에 담고 마트를 나가려던 찰라,
마트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과 몸이 부딪쳤다.
그 때문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
 
 

 
?”
 
 
그 때 그 남자다.
허리를 숙이고 내가 산 라면을 집던
그 때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떨어진 것들을 모두 줍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 근처에 살아요?”
 
“...”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환자복 차림의 남자를 보며 생각했다.
옆에 링거대만 없을 뿐,
그 때 병원에서의 모습과 똑같다.
춥지도 않은 지 그 옷 하나만 입고.
 
 
그럼......”
 
 
가만히 서있는 남자를 두고
마트 밖으로 나왔다.
지금은 누구도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가 언제쯤 죽을지,
그거 하나 괴로워하기도 벅차다.
 
 
저기요.”
 
“......”
 
 
집으로 가기 위해 몇 걸음정도 움직이니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뛰어왔는지 약간은
숨이 찬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나랑, 밥 먹을래요?”
 
“......”
 
 
남자의 손엔 그새 담배 한 갑이 쥐어져 있다.
 
 
.
.
 
 
집으로 가고 싶었다.
낯도 많이 가리고,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거절도 잘 못하는 성격이다.
밥을 사주겠다며 같이 먹어만 달라는
남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지금 한 손에 봉투를 든 채로
남자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뭐 먹을래요?”
 
“....아무거나..”
 
“......”
 
 
내 작은 목소리에 대답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환자복 차림의 남자를 한번 씩 뒤돌아보고,
그렇게 길을 걷다 보이는
한 식당 안으로 남자가 들어간다.
 
먼저 앉은 남자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니,
혼자 이것저것 음식을 시킨다.
그렇게 직원이 가고, 웅성웅성한 식당 속
조용한 침묵이 나를 감싼다.
 
 

 
“..고마워요, 밥 먹으러 같이 와줘서.”
 
, 아니에요.”
 
“...불편하죠?”
 
 
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살짝 튼 채 물어온다.
솔직히 불편하고, 집에 가고 싶지만,
이 남자를 볼 때마다
동정 아닌 동정심이 느껴진다.
아마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이해 좀 해줄래요?”
 
“......”
 
 
시끄러운 식당 한 가운데,
저 낮은 목소리만 내 귀에 울린다.
무엇을 이해해 달라는 건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대충 가늠이 된다.
 
내가 이런 차림인 것을,
내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한 것을,
내가 계속 말을 거는 것을.
 
 
많이 먹어요.”
 
“...”
 
 
어느새 테이블 위에 음식이 올라와 있다.
어색하게 한 숟갈을 뜬 뒤,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얇은 젓가락 소리와 숟가락 소리만
들리는 이 식탁 위.
남자의 헐렁한 하얀 환자복 소매에
빨간 무언가가 묻어있다.
휴지를 하나 뽑아 남자에게 건넸다.
 
 
여기.. 뭐 묻었어요.”
 
 
왼쪽 팔목 소매를 가리키며 입을 여니
, 하는 목소리를 낸다.
 
 

 
이거 안 지워져요.”
 
“......”
 
“...예전에... 너무 살기 싫어서,
딱 한 번 죽으려고 했었거든요.”
 
 
그제야 저 자국이 핏자국으로 보인다.
 
 
, 밥 먹을 때 할 얘긴 아닌데...”
 
“....괜찮아요.”
 
 
지금 나에겐, 그 어떤 얘기라도 괜찮다.
살기 싫어서 죽으려고 했다던 이 남자는,
지금 내 상황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 몸은 나 몰래 죽어가고 있는데,
이 남자는 얼마나 아프길래
죽음까지 결심했을까.
 
어느새 음식이 담긴 그릇들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한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손을 씻고 거울을 보니,
남자와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한 내가 보인다.
눈동자엔 빛이 없고,
무채색으로 뒤덮인 얼굴.
 
 
“......”
 
 
화장실 밖으로 나와 아까 그 자리로 가니
남자와 내가 들고 있던 봉투가 없다.
식당 바깥 쪽 창문을 쳐다봤다.
 
 
괜찮아요??”
 
 
식당 앞에 서있는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헛구역질 소리를 낸다.
놀라서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
그 옆으로 서니, 담배 냄새가 느껴진다.
 
 

 
......”
 
“......”
 
 
한 손엔 연기가 나고 있는 담배 한 개비가,
다른 한 손엔 내 봉투가 들려져 있다.
남자는 켁켁거리며 허리를 들었다.
 
 
“...몇 년만에... 처음 폈어요.”
 
“......”
 
그땐 너무 피고 싶었는데 못 폈거든요.”
 
 
마지막 말을 하며 담뱃불을 끈다.
그리곤 내 앞으로 봉투를 내민다.
내미는 팔목 위엔 길게 그은 자국이 보인다.
 
 
미안해요. 담배 냄새 나죠?”
 
“......”
 
 
나도 담배라도 펴볼까,
시답잖은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봉투를 건네받자 남자의 차가운 손이
내 손과 맞닿았다가 떨어진다.
벌써 11월 중순이다.
얇은 환자복 사이의 남자의 팔은 추워보였다.
 
 
“......많이... 아파요?”
 
 

 
“......”
 
 
머릿속으로만 물어보던 말이 입 밖으로 나갔다.
 
옷과 몸, 머리카락이 비에 젖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이 추운 날씨에 환자복 하나만 입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억지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고 싶을 만큼,
 
 
“......”
 
“......”
 
 

 
“...아파요.”
 
 
나는, 여름이 오기 전에 죽는다.
 
 
.
.
.
 
 
치료를 받아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
 
병명이라도 정확히 알면
치료를 확실하게 할 수 있을 텐데...”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병원 복도에 있는 삐거덕거리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다시 온 거야.
살 수 있을거라고?
치료가 가능하다고?
머리를 뒤로 숙여 벽에게 기댔다.
 
 
“702호에요.”
 
“......”
 
그냥, 생각나면 찾아와줘요.
얼굴이라도 보게.”
 
 
“......”
 
 
나처럼 남은 가족이 없는 사람 같았다.
혼자 아파서, 혼자 치료를 받다가,
혼자 입원을 한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702.
702호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병실 창문으로 보이는 남자는
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슴 아픈 건 좀 어때요?”
 
 

 
“...최근에는 별로 없었어요.”
 
그래요? 숨 가쁜 건?”
 
가끔, 한번 씩 그래요.”
 
 
병실 침대에 앉아 얘길 하고 있다.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힘들고...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병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밖으로 나온다.
 
 
, ㅇㅇ?”
 
“.., 안녕하세요.”
 
 
처음 병원을 왔을 때,
알지 못하는 내 병명을 위해 도와준 그 의사다.
결국 제대로 된 병명도 알지 못하고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되었지만, 나로선
고마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웬일이에요?”
 
... 누구 좀 만나러...”
 
 
미안해하지 말라고,
아픈 건 난데 왜 미안해 하시냐고.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혹시 지운씨?”
 
“.......”
 
 
남자가 있는 병실을 가리키며
물어오는 의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남자의 이름이 지운인 것 같다.
 
누가 병문안 오는 게 처음이라 놀랬다고,
그게 나라서 더 놀랬다는 의사에 말을
말 없이 듣다가 병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앉아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의사가 가고,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눈인사를 살짝 하고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박지운
남자의 이름이 보인다.
 
 
박지운이에요, 내 이름.”
 
 
이런 나를 눈치 챘는지 내게 이름을 말해준다.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ㅇㅇㅇ.. 이에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 위엔 얇은 이불이 하나 올라와있고,
손등에는 링거 하나가 꽂혀있다.
그 옆에 링거대를 쳐다보며 남자가 입을 연다.
 
 
영양제에요. 약은 아니고.”
 
......”
 
심장 보고 잘 좀 뛰어라고
간식 주는거죠.”
 
“......”
 
 

 
“....보통 이런 말 하면 웃던데.”
 
 
남자의 마지막 말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까 의사와 하던 얘기 때문에,
남자의 심장이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아는 나로선,
웃음이 나올 리가 없다.
 
 
“..ㅇㅇ씬 다 나았어요? 아팠던 거.”
 
“......”
 
 
순간순간 이 남자와 있을 때마다
내가 아프다는 걸 잊어버리게 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이 남자와 얘길 하면,
이 남자와 같이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래서 이 남자와 만나는 걸 수도 있다.
 
 
.”
 
 
남자에겐 미안하지만,
내가 최대한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인 것 같다.
 
 
, 부럽다.”
 
“......”
 
 
남자가 기지개를 하며 나를 바라본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있다.
 
 
ㅇㅇ.”
 
“......”
 
 

 
, 밥 좀 사줄래요?”
 
 
누군가 내 이름을 저렇게 불러주는 건,
저런 눈빛으로 봐 주는 건,
나를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든다.
 
 
.
.
 
 
이렇게... 막 나와도 돼요?”
 
돼요. 완전 돼요.”
 
 
결국 남자는
또 그 차림으로 밖에 나오고 말았다.
추울 것 같아 외투라도 걸치라는 나의 말에,
남자는 빈 옷장을 보여주며
괜찮다는 말만 했다.
빨갛게 물든 남자의 손가락이 눈에 띈다.
 
 
“...밥은... 어떤 거..”
 
 

 
“..아무거나.”
 
“........”
 
 
내 대답에,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저번에 갔던 그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난 남자의 뒤를 따랐다.
 
 
“...저거 재밌겠다.”
 
“......”
 
 
식당으로 가던 와중,
멈춘 남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인형 뽑기 기계가 보인다.
남자는 그 쪽으로 걸음을 돌린다.
 
 
제가 지금 삼천원이 있어요.”
 
“......”
 
 

 
저 토끼 꼭 뽑을게요.”
 
 
남자는 천원 세장을 넣으며 기계 안
작은 토끼인형을 쳐다본다.
기계 손잡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토끼 인형이 걸린다.
 
 
어어어... !!”
 
 
손잡이에서 떨어진 토끼 인형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쌀쌀한 날씨 속 얇은 환자복만 입은 남자는,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는다.
 
 
됐다 됐다!!”
 
 
집중하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기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토끼 인형이
밑으로 나와 있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인형을 꺼내 들고
웃음을 지었다.
 
 
나 잘하죠?”
 
 
순간 천진한 그 모습에,
입 밖으로 웃음소리가 나와 버렸다.
 
 
“......”
 
 

 
“......”
 
 
처음 보는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잘하신다...”
 
 
어색한 분위기에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텔레비전 웃음소리에 맞춰,
혼자 옛 생각에 잠겨 웃은 게 아니라,
진심으로 웃음소리가 나왔다.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한 번 웃더니
인형을 들고 말을 꺼낸다.
 
 
인형 줄까요?”
 
“......”
 
“...싫음 말고요.”
 
 
.
.
 
 
식당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고 한 숟갈, 두 숟갈 뜨자,
내 앞에 토끼인형이 올라온다.
 
 

 
진짜? 주지 말까요?”
 
“......”
 
, 여기. 밥값!”
 
 
밥을 먹다 말고 긴 팔로
내 왼손을 가져가 인형을 쥐어준다.
내 손에 들린 인형을 말 없이 쳐다봤다.
 
 
싫으면 그냥 주..”
 
아니요!”
 
“......”
 
“......”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약간 큰 목소릴 냈다.
오늘따라 내가 너무 나같지가 않아서,
고개를 슬그머니 숙였다.
괜히 인형만 꾹 쥐고.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네요.”
 
“......”
 
 
자꾸만,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
.
.
 
 
이 인형을 받은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난 아픈 몸이고, 곧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그냥 잊고 살기로 했다.
다 기억하며 살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왔어요?”
 
.”
 
 
시간이 날 때마다 남자의 병실을 찾아갔다.
아픈 건 괜찮은지,
먹고 싶은 건 없는 지,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게 낙이 돼버렸다.
 
 
그 인형은 항상 들고 오네요.”
 
“......”
 
 
내 손에 들린 토끼 인형을 양 손으로
꼭 잡았다.
너무 예쁘고, 작아서,
항상 들고 다닐 수 밖에 없는 인형이다.
 
 
밖에 많이 춥죠?”
 
. 손 되게 시려요.”
 
 
그래서 난 내가 아닌 것처럼
얘기 할 수 있게 됐고,
내가 아닌 것처럼 웃을 수 있었다.
이 남자와 함께 할 때처럼.
 
 
, 어제는 무얼 하셨나요 ㅇㅇㅇ.”
 
... 오랜만에 쇼핑을 했어요.”
 
 
내 삶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예전은,
하루하루가 지루했고, 끔찍했다.
 
 
? 옷을 사셨나요?!”
 
! 옷이랑, 화장품도 샀어요.”
 
 
근데 내 삶의 끝이 보이니,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했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서 아쉬웠다.
 
 

 
화장품?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비밀.”
 
 
그땐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에이 뭐야. 시시하네요 ㅇㅇㅇ.”
 
지운씨는 어제 어땠습니까?”
 
 
그때, 병실 문이 열린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 의사가 들어온다.
 
 
ㅇㅇ씨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한 달 전쯤 보고 처음 보는 그 의사.
, 여기 병원이었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나누시는 와중에 죄송한데,
오늘 지운씨가 받아야 할 검사가 있어서요.”
 
......”
 
검사가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작게 탄식을 뱉으며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미안해요. 제가 깜빡해가지고...”
 
아 아니에요. 내일 또 오면 되죠.”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겉옷을 껴입었다.
병원 밖 공기는 시리다.
 
바로 집으로 갈까.
아님 장이나 보고 들어갈까.
두껍게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사이를
지나가며 생각했다.
 
여기저기 사랑하는 사람들 투성이다.
연인, 가족, 친구.
난 언제쯤 그 세 개를 다 이룰 수 있을까.
 
 
“...어디갔지....”
 
 
거리를 걸으며
가방 안을 보는데 인형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손에 들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이랑 부딪혀 떨어졌나?
급하게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샅샅이 쳐다봤다.
 
 

 
 
“......”
 
 
. .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진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대며 비를 피하기 위해
이러저리 움직이고,
난 머리 위에 손을 펼치고 인형을 찾기 시작했다.
항상 손에 들고 있어서
잃어버리기가 쉬운 인형이었다.
 
 
... 어디 간거야...”
 
 
손이 미치도록 시리고,
긴 머리카락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어렵다.
 
 
....!!”
 
 
빨리 달려가던 한 여자와 몸이 부딪혔다.
그만 축축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쓸린 손바닥이 아리다.
 
 

 
“......”
 
“......”
 
 
순간, 손목이 잡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 몸이 빗물에 젖어
날 보고 있는, 그 남자다.
 
 
, 지운씨 왜...”
 
“...아니죠?”
 
?”
 
 
추워서 인지, 남자의 목소리가 떨린다.
내 손목을 세게 잡고있는
손조차 떨고 있다.
빗물에 가려 힘겹게 눈을 뜨고 남자를 쳐다봤다.
 
 
ㅇㅇ씨 다 나았다면서요
 
“......”
 
ㅇㅇ씨 아픈 거 다 나았다며, ?”
 
 
나를 마주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손목은 멍이 들 것처럼 너무 아픈데,
이 남자의 표정이 더 아프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었다.
 
 
ㅇㅇ!!!”
 
“......”
 
 
내 이름이 소나기 속 거리에 울린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눈은 시리고, 코 끝은 따갑다.
 
 
“......”
 
 

 
“......”
 
 
핏줄이 잔뜩 선 눈으로 날 슬프게 쳐다보고,
덜덜 떨리는 입술로 내 이름을 부르고,
다 젖어가는 몸으로 나를 안아준다.
 
빗 속엔, 우리 둘 뿐이다.
 
 
.
.
.
 
 
[번외 ; 지운이와 ㅇㅇ이가 평범한 연인이었다면]
 
 
나 병원 갔다 왔어.”
 
 

 
. 변비 때문에?”
 
개새
 
 
[번외 ; 2]
 
 
와 소나기 쏟아지는 거 봄??”
 
. 진짜 추워 죽는 줄.”
 
그러니까 왜 그거 하나만 입고 갘ㅋㅋㅋㅋ
 
 

 
모름지기 패션이란...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추운 것...”
 
“......
 
 
[번외 ; 3]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 아니아니!”
 
“...있네. 뭐야.”
 
“......사실은... 니가 저번에 준 인형...
잃어버림
 
 

 
아 그거? 괜찮.
난 니가 사준 30만원 짜리 축구화 잃..”
 
야 이 개시

.
.
.

※만든이 : 비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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