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Noise 02 (by. 마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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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N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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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권혁
김원필
송민호
박찬열
장다혜
 
 

.
.
.


 
EP2. 각자의 방식
 
 
 
 
 
. 따분하다.”

작업도 안 되고

쓰읍, 뭐지? 뭘까아?
원래 잘 되던 게 안 되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송민호 씨?”

, 저 방금 전까지 가사 쓰고 있었어요. !”
 
요거, 요거맨날 놀 궁리만 하고 있고! 혼 좀 나야겠어요!”

아아, ! ! 나 피어싱, 피어싱! !”
 

민호에게 헤드락을 건 원필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휴게실을 휩쓰는 동안,
작업 중인 다혜와 혁은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후우화음.”

.”

여기는 그냥 원래대로 할까?”

아니, 그건 진짜 좀아닌 거 같아. 하아.”


이미 회의실 테이블과 한 몸이 된 다혜가
악몽 같은 화음 작업에 뒤척이는 동안,
혁 역시 과열되기 일보직전인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고민은 거듭했다.
 
 
 
그 시각, 회의실 문 밖에선
비글 세 마리가 문 앞에 쪼르르 붙어 서 있었는데.
 
 
 

 
그냥 확 열고 확 말해버리자니까요?”

그랬다간 우리 쫓겨나 인마
 
일단 노크 해 봐요.”
 
 
똑똑.
셋 중에 우뚝 솟은 찬열이
급작스럽게 노크를 하자,
옆에 있던 민호와 원필은 경악스런 눈으로
다가올지 모를 공포에 미리 떨고 있었다.
 
 
 
, 방해된다고 뭐라 하면 어떡해!”

형이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아 암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요?”
 

 
우린 둘 다 없어. 멍청아!”

무슨 일이야?”
 
흐에에엑!”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멀찍이 떨어지는 민호와 원필.
문 앞에는, 밀대라도 세워놓은 마냥
찬열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한편 문을 열고 고개만 내민 혁은
구석에 찌그러진 미어캣 두 마리를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바로 찬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형 지금 작업 안 되죠.”

?”

아아니이렇게 금방 나오는 거 보니까.
약간 작업에 난항을 겪으시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그래서 요점이 뭔데?”
 
 
잔뜩 긴장해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찬열을 보며
혁은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 우리 놀러 가요!”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흘끔 눈치를 보는 찬열이었다.
혁은 그런 그를 아무 말 없이 빤히 보고만 있었다.
 
 
 
, 역시, 안 되겠죠? 그쵸. 작업 중에 무슨! 놀긴 뭘 놀아!”
 
푸흐.”
 
“?”

, 미안.”
 
 
 
별안간 큭큭 웃어 대던 혁이
작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이내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나왔다.
 
 
, 갈 거에요? ?”

나 사실 약속 있어서 나온 거야.”

그럼?”

너 잔뜩 쫄아 있는 게 귀여워서 그냥 본 건데?”

아아, !”
 
 
덩치에 안 맞게 앙탈스런 소리를 내며
발을 동동거리는 찬열을 보고
어느 새 민호와 원필까지 가세해
다들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들 뭐가 그렇게 재밌어?”

, 도비 하는 짓이 귀여워서.”

귀여워요, ? 이게?”

맞아. 징그러운데요.”

어휴하여간 잘생기면 피곤하다니까.
이 시기와 질투, 끊이지 않는 루머와 비방.”
 
 
피곤해서 못 살겠다는 듯이 눈을 감고서
양 손을 허리에 짚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찬열.
 
 
 
쟤 뭐래냐?”


 
몰라요. 드디어 맛 간 듯.”

어째 정상이 하나도 없어.”

나 간다.”
 
 
혁이 그런 찬열을 지나쳐 가고,
하나 둘씩 자리를 피한다.
 
 
 
그니까, 질투에 눈 먼 자들아, 관리를 해. !”
 
 
 
모두가 아는데 찬열만 모른다.
아까부터 혼자 남아 원맨쇼를 하고 있었다는 걸.
 
 
 
다들 어디 갔어!”
 
 
 
 
 
White Noise
 
 
 
 
 
어느 덧
네온사인 불빛만이 거리를 밝혀주는,
깜깜한 밤이 찾아오고
마치 어두워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 둘 거리로 나온 사람들로
한산했던 거리가 금세 붐비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크네.”
 
 
00는 메시지로 받은 지도 위치와
건물 위치를 번갈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나 공연 해. 보러 와주라.]
 
 
 
그 흔한 서론 하나 붙이지 않고
덜렁 온 메시지였다.
그것도 전 남자친구에게서 온.
답장이 오지 않아도 그 애라면 올 것이라고,
그는 예상 했을 터.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으로 메시지를 보낸 것까지
짐작한 00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와 있는 사람들로
반은 채워져 있었다.
좌석 하나 없이 올스탠딩으로 있어야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는 00였지만
나름 앞줄에 서게 된 것에 왠지 모를 자부심을 느끼며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
 
 
 
 
 
? , 누나. 우리 여기 갈래요?
여기 새로 생긴 데라는데 완전 좋대요.”
 
나는 좀

왜요?”

나 친구들이랑 클럽 가기로 했는데.”



 
사스가 왕년의 클럽 죽!”
 

 
, 뭐라고 민호야?”
 
 
죽고 싶다고?
눈으로 살인 예고장을 보내는 다혜를 보고선
그대로 굳어버린 민호가
움직이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건치 미소를 짓는다.
 
 
 
, 됐어요. 간만에 남자들끼리 뭉칩시다!”

그래, 그래! 비글들 함 뭉치자! 함 뭉쳐보자!”
 

 
저어기.”

? 형 왜요?”

설마

미안!나 사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는 걸 깜빡 했네!”

, 진짜 실망이다.”

그러니까. 배신자.”

뭐가 또 배신자야아!”

됐네요. 우린 우리끼리 놀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끼리!”

그래! 친구야!”
 
지랄하소서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이 뜨거운 우정의 포옹을 나누는 사이,
어디선가 휴대전화 진동소리가 들려온다.
 
 
 
, 야 민호야. 전화 받아! 전화.
둘이 그, 좀 떨어지고 좀!”

, ? 누구지?”
 
 
민호가 전화를 받는 사이
다혜는 가방을 챙겨들고 쿨하게 나가버렸고
원필 역시 나갈 준비를 했다.
 
 
 
누구?”
 
.”

, 너 설마, 절대 안 돼. 안 돼? ?”

진짜 미안!”
 
, ! 어딜 가!”
 
 
두 손을 모아 얼른 사과하고 튀려던 민호를
가까스로 붙잡은 찬열.
그의 커다란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만 같다.
 
 
 
아니, 지훈이 형이 휴가 나왔다고 보자는데 어뜩하냐.
너랑은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고
한 달 뒤에도 볼 수 있지만 형은.”

, 진짜 서운하다! 내가 꿔다놓은 똥자루야?
나도 인마! 언제 사라질지 몰라!”

보릿자루겠지. 인마, 똥자루를 누가 꿔?
너는 될 수 있으면 문자 쓰지 마라.
창피함은 내 몫이야 하여튼.”
 

 
배신자는 조용히 가시고요
 
!”
 
, 암튼 절대 안 돼. 나야? 그 형이야?”
 
아주 신파극을 찍어라 둘이서
 
 
 
혀를 끌끌 차며 그 옆을 지나는 원필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찬열은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제 딴에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짓는 민호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
 
 
 
 
 
, 시작한다.”
 
한다, 한다, 한다!”
 
, 어떡해. 나 심장 터질 거 같아. 미친.”
 
 
각자 얘기하느라 웅성대던 장내가
조명이 꺼짐과 동시에 잠시 조용해지나 싶더니
금세 열렬한 환호가 이어졌다.
 
 
 
역시 첫 곡은 이거네.’
 
 
 
00에겐사귀는 동안 참 많이도 들었던익숙한 노래였다.
이제는 원곡자의 노래를 듣고 있어도
그의 목소리가 덮어 씌어서 들릴 만큼.
 
 
 
달달하고 기분 좋은 노래가 이어지고,
앞줄의 여성 관객들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느라 바쁜 동안
그녀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린 얼굴로
한 손에 쥔 야광 스틱을 까딱까딱 하며
그저 무대를 감상했다.
 
 
 

 
 
 
귀여워! x나 귀여워!”

웃는 거 봐. 미쳤나봐. 오빠!”
 
 
눈꼬리가 살짝 휘도록 웃곤
기분 좋게 노래하는 그.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곧 기쁨의 눈물이라도 흘릴 듯 한 표정의 여성 관객들.
 
 
 
, 변백현 시작했다.”

저 새끼 끼 부리는 거 봐.”
 
 
 
물론, 남성 관객들의 반응은 다소 달랐다.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제 팔뚝을 쓸어내리는
두 남정네들 사이로
그저 웃으며 무대를 보고 있는 혁이 있었다.
 
 
 
별 거 아닌 거처럼 말하더니.
노래 꽤 하는데?”

사실 고딩 때부터 실음 학원 뻔질나게 다니던 놈이야.
아이돌 기획사에서도 캐스팅 몇 번 받았었지.”
 
 
 
사실 혁은 지금 무대에서 노래 중인
변백현이란 사람과 전혀 친분이 없다.
사실, 이름도 방금 알았다.
대뜸 공연 보러 가자는 친구 놈의 연락에
마침 머리도 지끈대겠다,
덜컥 알았다승낙 하고선
여기까지 온 게 전부였다.
 
 
 
여러분, 공연 재밌어요?”

!”

그럼잠깐 쉬어가는 의미로 느린 곡 하나 부를게요.”
 
 
 
느린 곡을 부르겠다는 말에
종전의 그 여성 관객들이 홀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어후, 반응이 엄청나네요.
발라드가 그렇게들 듣고 싶었던 거야?”
 
 
조금은 능글맞게 웃은 그가 준비된 피아노 앞에 앉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다음 곡을 준비했다.
 
 
 
모두가 알만한 전주가 흐르고,
흥분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 무렵
첫 소절이 시작되었다.
 
 

 
 
서러운 맘을 못 이겨
잠 못 들던 어둔 밤을 또 견디고.”
 
 
 
피아노를 연주하며
마치 울음을 삼킨 듯
처연하게 노래하는 그의 모습에
그 짓궂던 친구들도 어느 새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혁 역시 허공을 멍하니 보며
귀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시야 끝으로 걸리는
앞에서 비추는 조명에 언뜻 비친익숙한 얼굴.
 
 
 
‘000?’
 
 
 
급히 고개를 돌려보지만
조명이 사라진 자리의 얼굴을 알아보기란 어려웠다.
 
 
 
 
 
 
들려오는 노래 소리도 잠시 잊고
그가 멍하니 그 자리만 바라보는 사이
노래는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내겐 내가 없어. 난 자신이 없어.
네가 없는 하루 견딜 수가 없어.”
 
 
 
브릿지 구간이 되자
간간이 들리던 웅성거림도 사라지고
마법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조명은 다시, 앞줄 언저리를 비추었다.
 
 
그냥 날 안아줘. 나를 좀 안아줘.
아무 말 말고서 내게 달려와 줘.”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며 노래하는 백현.
늘 그렇듯 백지 같은 표정으로 무대를 보고만 있는 00.
그런 00를 바라보고 있는 혁.
 
 
 
그러다 혁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노래를 부르고 있는 백현에게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그는, 분명히 저쪽을 향해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곤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거두고 잠깐 멍하니 있던 혁은
다시 서서히 00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리석고 나약하기만 한 내 마음을.”
 
 
 
노래가 끝나자,
00는 여느 다른 관객처럼 박수를 칠뿐이었다.
조금의 불편함도, 어떤 이질적인 감정도 스치지 않은 얼굴로.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는 혁이었다.
 
 
 
 
 
-
 
 
 
 
 
공연이 모두 끝나고, 00는 백현이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초대해줬는데 인사는 하고 가야지.’
 
 
 
가벼운 발걸음으로 간 대기실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마주한 백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마 입도 떼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초대한 사람 표정이 왜 그래?”

?”

혹시, 잘못 보냈는데 내가 모르고 온 거 아니지?”

아냐.”
 
 
백현은 뒷머리만 긁적거리다
이따금씩 00를 흘끔거렸다.
 
 
 
노래 좋던데. 저번, 종대 씨가 쓴 그 곡이지?”

 
 
그 곡이라함은 약 6개월 전,
그러니까 두 사람이 사귀었던 때,
백현이 00에게 들려줬던 곡이다.
언젠가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은 곡이라며.
 
 
 
초대해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공연 있으면 말해줘.
나 가진 게 시간 밖에 없잖아.”

.”

아 그리고 이건, 공연 축하 선물.”
 
 
 
,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네는 00.
얼떨결에 받아든 백현이 뭐냐고 묻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자,
뒷풀이 하면서 마셔. 그거 좀 비싼 거다?
살짝 너스레를 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서며 손을 흔들었다.
 
 
 
갈게.”
 
 
 
00가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선 자리에서
남겨진 그는 퍽 복잡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 잠깐만!”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에 초조해 하던 백현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시, 나가서 바람이나 쐬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00에게
백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계속 지하에만 있었더니 답답해.”
 
 
 
 
-
 
 
 
 
 
혹시 안 오면 어쩌나 했어.”

푸흐, 너 내가 올 거라는 거 알았잖아.”

. 그래서 보냈지. 근데, 사실 조금 겁이 나긴 했어.”
 
 
벽에 붙어 나란히 선 채로
백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항상 익숙하다가도 낯설게 굴었으니까.”
 
 
 
애써 잡아당겨 웃고 있는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볍게, 가볍게 말하자.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

그거. 내가 꽤, 매력적이란 얘기로 들린다?”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00
긴장이 탁 풀리며 고개를 떨어뜨린 백현은
푸스스 웃어버린다.
 
 
 
할 얘기가 뭐야?”
 

바람 쐬자고 나랑 같이, 여기 있을 리는 없고.”


맞지?
나직하게 묻는 말에
그는 또 다시 낮게 웃기만 했다.
 
 
 
넌 정말.”
 
 
 
분명 입은 웃고 있으나
그 웃음이 꽤나 쓸쓸한 백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다 볼 순 없었지만
00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이 나.”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말하는 백현.
00는 고개 숙인 그를 응시한 채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려준다.
그러던 중 그가 숙였던 고개를 다시 천천히 들고
그녀가 서 있을 곳을 조금, 돌아다본다.
 
 
 
홧김에 헤어지자고 한 건 난데, 자꾸 네 생각이 나.”

.”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못한 채로
속엣 말을 내뱉던 그가 흘끔,
그녀의 표정을 살핀다.
무덤덤한 눈빛.
익숙해서 더 아픈 그것 때문인지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초조함이 확 걷히었다.
그녀를 똑바로 마주본다.
가볍게, 가볍게.’를 되뇌던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 그래. 그 표정.
너는 내가 이런 얘길 꺼낼 때마다 항상 그런 표정을 지어.“
 
 
마치 남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는 것처럼,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그런 표정.”
 
 
 
그 말을 하는 백현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은, 짜증과 분노보다는 차라리 서러움에 가까웠다.
 
 
 
그래. 넌 항상 이런 식이니까.
그래서 한 번 막 나가봤어.
마음도 없으면서, 여자애들 잔뜩 만나고 어울려 놀고.
근데 넌, 그런 날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아.
너는 늘! 아무렇지 않아.”
 
 
 
점점 가빠지는 호흡을 따라 빨라지는 말소리.
맥이 탁 풀리듯 끊긴 말 뒤로
깊은 한숨처럼 들려오는 그의 독백.
 
 
 
너만아무렇지 않아.”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목소리가 떨려 말끝을 흐리던 백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굳게 내리다물었다.
 
그가 더 이상 말하지 않으니
둘 사이에는 깜깜한 침묵만이 자리했다.
00는 힘없이 축 늘어져 정수리만 보이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어?”

.”

계속 가 볼래?”
 
 
너무나 차분한 표정과 목소리.
고개 숙인 그는 죽어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그를 보는 00의 마음은
마치 잔뜩 엉킨 실타래를 보듯 착잡했다.
 
 
한 때 연인이었던 걸 떠나
백현은 그녀에게 있어, 같이 있으면 즐겁고 좋은 사람이었다.
연애가 아니라면 곁에 남을 수 없다는 그를 보니
제 마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연애 상대로서
그의 바람을 다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은 또 아니었기에.
 
 
모르겠어 나는. 근데 오래 가진 못할 거야.”

.”
 
 
00는 엉킨 실타래를,
그 한 가운데를,
잘라버리려 한다.
 
 
 
네가 아니라 나 때문에. 결국 또 다시
 

 
날 사랑했어?”
 
?”

대답해 봐. 날 사랑했었어?”
 
 
 
다시 고개를 들고 00를 마주한 백현의 눈은
그렇다고 대답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00 역시 그 바람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어떤 마음이어야,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
 
만약 네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내가 너 아니면 죽을 것 같다거나,
너 대신 죽어주기라도 한다거나 그런 거라면,”
 
 
난 널 사랑하지 않았어.”
 

늘 무덤덤하고, 흐르는 대로 흘러갈 것 같던
00의 표정이 낯선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백현은 당황하기도 잠시,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너 왜 이렇게 나빠.”

너도 잘 생각해 봐. 네가 날 사랑했는지.
그냥 트로피처럼 날
 
“000!”
 
 
 
그런 아픈 말을 하면서도
여유롭다 못해 낮게 웃으며 말하는 00를 보다
백현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
저를 붙잡은 백현의 손을 떨친 00
말없이 제 팔목을 내려다보곤,
이내 시선을 올려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 날 사랑한다고 하는 너 자신을 사랑한 거야.”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말.
백현은 고개를 떨어뜨리곤 호흡을 가다듬었다.
00의 팔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노란 불빛에도 보일 만큼.
그런 자국을 내 보이면서도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의 원망이나 분노도 담기지 않았다.
 
 
 
이건!”
 
변백현!”
 

변백혀언!”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백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허공만 바라보던 00
이윽고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슥 시선을 던진다.
 
 
 
너 어딨었어?”
 
 
원필이다.
그가 왜 여기?
그를 본 00의 눈에 잠시 의문이 떠올랐지만
이내 가라앉은 듯 본래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형들이 너 찾는데 전화도 안 받고 인마.”

.”

빨리 가 봐. 찾은 지 30분은 됐을 거다.”

.”
 
 
백현은 표정만큼이나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떼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미안해.”

 
 
 
00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한 백현은 곧장 뛰어 가버린다.
 
 
 
 
 
 
방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표정도 없는 00.
원필은 잠시 동안 그런 그녀를 응시하다
발걸음을 뗀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
 
 
 
그러다 00의 앞을 지나칠 찰나,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날선 말을 내뱉곤
휘적휘적 그 앞을 지나쳐 간다.
홀로 남은 00
마치 숨을 내뱉듯 피식 웃어버린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아까의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
원필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거 알아요? 두 사람. 정말 똑같아.”
 
 
알 수 없는 대상에게 던진 말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텅 빈 길에 울렸고,
잠시 뒤 원필은 옆으로 돌아섰다.
 
 
 
 
 
 
구부정하게 벽에 기대 서 있던 혁이
자세를 고쳐 똑바로 선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툭툭 털더니
발로 비벼 끄곤, 원필을 바라본다.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걸려있다.
 
그렇게 웃는 것까지 똑같네.
원필은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지금 그에게서 그 웃음을 지워볼까.
반쯤은 장난이 섞인 나쁜 생각이 스쳤다.
 
 
 
아니지.”
 
 
 
건조하던 원필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웃음이 떠올랐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형은, 왜 여기 있어요?
질문과, 이미 알고 있는 답이 섞인 표정으로
원필이 물었다.
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형이라면,
여기까지 쫓아 나와 엿듣고 있어선 안 됐죠.
그것도 숨어서.’
 
 
 
형답지 않게.
이어질 말을 표정으로 대신하며
원필은 웃어보였다.
 
 
 
 
 
-
 
 
 
 
 
권혁!”
 
전화 안 받는데?”
아 이 새끼. 어디 가면 간다 말이나 좀 하지.”
 
 
담배 한 대 피고 온다던 녀석이 감감무소식이자
찾으러 나온 두 친구가 그렇게 돌아가고,
혁은 홀로 바를 찾았다.
 
 
 

 
 
같은 걸로 한 잔 주세요.”
 
 
술잔을 빙글, 빙글 돌리며
그 찰랑임을 들여다보기에 여념 없는 혁의 옆 자리에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여자가 앉았다.
익숙한 듯 바텐더에게 주문을 마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려 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혼자 왔어요?”


쳐다도 안 보네. 사람 민망하게.”

 
,”
 
 
잔뜩 빈정 상한 그녀가
주문한 술이 나오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든 혁이 위를 올려다본다.
 
 
 
?”
 
 
물음표로 가득한 혁의 얼굴을 보고
더욱 인상을 구긴 그녀는 홱 하니 핸드백을 챙겨
또각또각 성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었을,
제 멋대로 돌아간 의자와
아직도 깊게 잔향이 남은 향수 냄새.
 
왠지 그것들이 새삼스러웠다.
 
 

 
 
무엇에, ,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냥 화가 났다.
아니, 자신이 화가 난 사실도 모른 채
혁은 손에 잡히는 대로 술잔을 비웠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야.”
 
-. 너지. 무슨 일이야?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아님 들어달라고 전화한 거야?
 
 
 
 
보고 싶어서.”
 
 
 
 
* epilogue
 
 
 
 
 
다른 건 다 모르겠고 그냥 네가 보고 싶었다.
너를 보고, 너를 듣고, 너를 안으면
그러면 다 상관없었다.
 
아무런 인과 관계가 필요 없어진다.
너는 그렇게 했다.
 
 
 
 
 
알려준 대로 너의 집 앞까지 오긴 했는데
또 뭐가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문을 여는 순간
이미 변해버린 나를 인정하게 될 것 같아서.
아니, 이미 어느 정도 인식하고는 있지만.
 
 
 
하아.”
 
 
차가운 문에 손을 대고 기대어 있노라면,
마치 내가 있을 걸 알았던 것처럼
문이 열린다.
 
 
 
예상 못한 그림인데 이건.”

 
 
 
방금까지 건조했던 내 표정에
,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소가 떠오른다.
너는 늘 나를 웃게 한다.
 
 
 
안 들여보내줄 거야?”

생각 중이야.”

내가 무슨 짓 할까봐?”

벨을 못 찾을 만큼 많이 마신 걸까,
아님 벨 누르길 망설인 걸까.“

 
후자면, 다시 모른 척 닫아 주고.”
 
 
네 얼굴에 내가 좋아하는 미소가 떠오른다.
여유로운 웃음.
이목구비 뭐하나 긴장되지 않은 편안한 표정.
 
비로소 나는 푸스스 웃어버린다.
 
 
 
둘 다 아닌데.”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현관의 센서등이 꺼졌다.
 
 
 
이렇게 할까봐.”

 
망설인 건데.”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숨이 내 코끝을 간질이는 걸 보니,
너는 또 내가 좋아하는 웃음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같을까나.
 
너의 표정이 보고파
손을 살짝 움직이자 센서등이 다시 켜진다.
 
 
 
두 팔 사이로 그렇게도 보고 싶던 네 얼굴이 보인다.
이제는 라는 물음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너 진짜 이상한 애인 거 알지.”
 
너만 할까.”
 
서로 이마를 맞댄 채
아주 약간의 힘을 주어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인다.
곧 터져 나오는 00의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예전의 나 자신 보다,
이젠 네가 더 좋아졌어.
 
 
 
.
.
.

※만든이 : 마젠타님
 
 <덧>
 
 
안녕하세요.
2개월 만에 2화를 들고 온 마젠타입니다.(눈치)
사실 세이브 파일이 날라 간 것에 멘붕이 온 것도 있지만
과제니 뭐니 정신이 없었다는 
저의 핑계를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라요..
 
오늘은 각자의 사랑 방식에 대해서
넌지시 보여드렸는데
재밌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댓글에 남겼던 대로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글이니 만큼
늦더라도 열심히 연재 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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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No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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