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 두려운 사람들 [단편] (by. 콩이)

내일이 두려운 사람들 [단편]
 

 

 

000
김태형
 

 

 

방학 같지도 않았던 여름 방학이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내 인생의
거사가 치러지기가 카운트 백에 접어
들었을 때였다. 그 시기의 내 또래들은
나와 비슷한 행보를 걷는 듯 차이를
각각 보였는데, 나의 경우 마감 날짜에
맞춰 간당간당하게 접수를 하고 있었다.
 

여름 날씨 X같다며 짜증을 낸지 엊그제
였으나 원치 않은 소원을 들어준 하늘은
그새 쌀쌀해졌다. 이제는 낮에 에어컨을
트는 일이 줄어들었고 교실에는 하나 둘
담요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린
이들도 눈에 띄게 보여서, 교실 안은 콜록
거림과 콧물이 흐를까 킁킁대는 작은 소음이
나부끼고 있었다.
 

올해의 반이 한참 지나가고도 말기에
접어들 무렵의 나의 일상은, 너무나도
간단해서 남이 들어도 외울 만할 정도다.
평일은 새벽부터 일어나 저녁 9시까지
학교, 11시까지 학원, 1시까지 독서실.
주말은 오로지 독서실. 가끔 가다 있는
일탈을 제외하면 변동사항이 일절 없는
생활표였다. 추석을 지나고 친척들에게
한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요새는 일탈
마저 눈치가 보여서 친구들과 거리감이
생길까 했지만, 나머지도 나와 별반
다른 입장은 아닌 듯 보였다.
 

그래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00, 다음 진로상담
네 차례래.”
 

 

할 말을 마친 내 앞 번호는 제자리
로 돌아가 정지 시켜놨던 인강을 다시
재생 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구나,
막상 차례가 다가오자 나는 진저리를
내며 기출 모의고사를 덮었다. 진로
상담할 바에 영어듣기를 한 번 더
듣겠어. 그토록 도피하고 싶은 1순위가
공부지만 최근 들어 순위변동의 필요를
느끼는 것이 바로 진로였다. 여태
하라는 대로 다 했더니 갑자기 나더러
하고 싶은 일이 뭐녜.
 

 

그냥 점수 맞는 곳 가려구요.”
 

 

알면 내가 이러고 있었을까?
나는 수시에 넣은 자소서의 포부와
달리 의욕이 없었다. 꿈이 있다 치자,
그럼 이루기 위해 가야할 대학은 갈
수 있나? 게임처럼 어느 정도의 렙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전직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였다. 무언갈 성취하는데 노력이
없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지만, 나에겐
그 노력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아보였다.
 

 

하기 싫다....”
 

 

담임한테 잔소릴 들었다. 수능이 얼마나
남았다고 이렇게 지낼 거냔다. 담임은 내
의욕을 자극시키기 위해 다른 학생을 끌어다
비교를 시켰지만 결과는 자존감만 낮아질
뿐이었다. 걘 벌써 준비를 다 했구나...
 

나만 엄청 비효율적인 사람 같았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새벽까지 공부를
하는데, 성과는 미미하고 피로감은
산더미로 누적시켜 놨다. 그래서 더
공부가 되질 않았다. 추석 때 잔뜩 받
아놓은 홍삼세트를 매일 챙겨먹는 게
마치 쓰러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욱여
넣는 영양제라고 느껴졌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자기관리를 할까, 남들 따라해서
몸이 들어맞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는 걸.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수능을 앞두고 무척이나 불안한.
 

 

다녀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수능만 끝나면 네 세상
이라며 조금 더 참으라고들 한다.
다른 이들은 수능이 끝이 아니고 앞으
로도 무수히 많은 시험들이 있을 거래.
 

그것은 나에게는 머나먼 이야기처럼
느껴졌고, 수능을 치면 까마득하다는
것만 생각났다. 즉 겪어본 사람들의
무용담이 썩 와 닿지 않다는 것이다.
 

 

저 잘게요.”
 

 

침대에 퍼질러 누워있으면 1분 만에
곯아떨어질 자신이 있다. 허나 깊게
잠드는 건 아니라서, 꿈은 항상 꿔왔다.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 일어나면
백지장처럼 깨끗하기에 애써 기억
해내고 싶지도 않아. 만약 꿈이
나에게 인상 깊게 남고 싶어 한다면,
나는 하나의 조건을 제시할 것이다.
 

깨어나기 싫을 정도로, 현실의
내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의
꿈이어라. 그럼 평생 기억해줄게.
 

오늘따라 유달리, 다가오는 내일이
싫은 밤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
무의식에 한 문장을 적어놓았다.
 

 

벗어나고 싶다고.
 

 

 

 

 

 

내일이 두려운 사람들
Those who dread tomorrow
 

 

 

 

 

 

나는 자각몽을 한 번도 꿔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꿈에서 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제어해본 적도 없었고, 휩쓸리다
잠에서 깨어나는 게 평범한 이었다.
 

언제부터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눈 앞에는 어느 순간 무수히 쏟아
지는 빛이 있었다. 눈부셔서 손바닥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조금씩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빛을 뚫자
보이는 광경은 푸르른 숲속이었다.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 새의 지저귐,
심지어 피톤치드 냄새까지 생생했다.
 

나는 몸을 살펴보았다. 짙은 남색의
교복 재킷에 명찰이 달려있다. 촘촘히
바느질되어있는 ‘000’라는 글자가
이라는 걸 제대로 각인시켜
주었다. 잠옷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어디지...??”
 

 

산 속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살면서
한 번쯤은 스쳐지나가 봤을 곳도
아니야. 우거진 나무들은 하나같이 키가
커서 끝을 바라보려니 목이 아플 지경
이었다. 우선 시야가 넓게 확보가 될
때까지 걷기로 했다.
 

 

“......!”
 

 

겨우 몇 걸음 가다가
멈춰버리긴 했지만.
 

이런 숲 속에 사람이 있었다.
꿈이니까 그러려니 납득했다.
 

 

“.........”
 


 

 

남자는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나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걸음에 나는 뭘 잘못했는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는 여기가 어디냐며 물어보려는
내 질문을 가볍게 무시하곤, 냅다
손목을 잡아채며 단호히 소리쳤다.
 

 

여기 오면 안 돼!”
 

“......?”
 

돌아가, 빨리!”
 

, 왜이래요???”
 


 

실랑이 벌일 시간 없어.
여자가 오기 전에 깨어나야 해.”
 

 

그 여자?’ 나는 이곳의 방문자였기
때문에 정체를 알 리 없었다. 그저
이 남자가 혼자 안달내하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답답해 여겼다.
 

아니 그럼 여기가 어딘지 설명부터
해주시던가. 질질 끌려가는 내가
이유라도 알아야할 것 같아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누구세요???”
 

갑갑해 미친다 진짜.
이름 알면 뭐가 풀리기라도 해?”
 

 

꿈이잖아. 꿈에서는 이름 알면
나랑 어떤 관계인지 척척 나오던데?
 

그 때, 풀숲이 일렁였다. 나와 남자는
굳어버렸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1%
되지 않은 나와 달리 그는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 늦었다.”
 

 

사방에서 기척이 느껴져서 탈출구가
없었다. 잔뜩 겁에 질려있는 나를 진정
시키려는 듯 그는 눈높이를 맞추며
두 팔을 움켜쥐었다. 방금 전까지
짜증을 내놓고, 이상한 사람이야.
 

 


 

일단 당장은 나가기 글러먹은 거
같으니까 이거 하나만 명심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뭘 믿고?’ 머릿속에는 이성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나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손에 땀이 났다.
 

 


 

시커먼 놈들이 튀어나오고 나서
마지막에 어떤 여자가 나타날 거야.
그럼, 그 여자를 믿지마. 절대.”
 

 

당장 널 해치진 않을 거야.’ 남자는
안심하라는 증표로 살짝 웃었다.
그렇담 당신은? 나는 그의 옷깃을
잡으며 물으려고 했다. 그 전에 남자가
말한 시커먼 놈에 의해서 그가 나무에
목이 잡혀 처박혀 버렸지만 말이다.
 

 

!!”
 

 

비명을 지르지 못해 목구멍으로 넘어
갔다. 두 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입만 틀어막고 있었다. 여기에 남자가
있는 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이것
들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사람이라기엔 괴상하게 움직이고,
피부색은 인종을 떠나 보랏빛이 섞인
검정이었다. 이목구비는 형체만 있었고
눈은 알이 없으며 푹 파여 있었다.
 

 

으으으......!!”
 

 

도망 가야해, 도망가!
백 번이고 속으로 외쳤다.
부들거리는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
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
앉아버렸다. 저 남자 다음은 내 차례
일까? 눈이 없는 그들이지만 나를 보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너무 놀라서 눈물도 안 나와,
나는 꿈에서 깨길 바라며 땅에
머리를 박으려고 했다. 그 때,
 

 

이런, 방해꾼이 있었네.”
 

“......!”
 

손님이 왔는데 실례를 끼쳤구나.”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너머에서 간드
러지게 다가왔다. 부산스레 흩어져
있었던 괴이한 것들은 명령하지도 않았
건만 알아서 대형을 갖추며 둥글게 섰다.
누군가가 맞이할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무 사이로 화려한 수가 놓인 가마가
머리를 보이더니 4명의 인부들이 힘
겹게 땅을 밟고 어깨엔 가마의 다리를
하나씩 진 채로 내 앞에 멈췄다.
 

여성의 목소리는 이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얼마나 귀하신 몸인지 가마
에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분주했다. 그녀가 앉을 전용 의자에
파라솔마냥 커다란 양산, 핑크색을 좋아
하는지 온통 핑크로 도배를 해놓았다.
 

나는 이 준비 과정에서 덜렁댔던
심장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가마에서 나왔
을 때, 다시 한 번 헉하고 숨을 참았다.
여자는 무척이나 거구로, 어째서 이런
부대비용이 많이 드는지 실감할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또 너냐, 김태형.”
 

오랜만이죠?”
 

 

남자는 충격에 정신을 잃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했다. 이마에
새빨간 피가 흐르는 데도,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사람처럼
여인을 향해 실실 거렸다.
 

 


 

이 정도 했으면 좀 보내주고
그래라. ? 나 좋아하는 줄
알겠잖아요~”
 

이번에야말로 도망치지
못할 줄 알거라.”
 

 


 

 

여자의 손짓 하나에 우악스레 끌려
가는 남자. 대화를 통해 추측하건데
남자와 여인은 악연이고 여자 쪽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는,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해서
잡혀가는 난관에도 불구하고 즐기는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김태형
나는 여자에게서 주워들은 그의
이름을 외웠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이리로.”
 

?”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 마침 명찰이 있네요.”
 

 

여자는 드디어 나에게 관심을
돌렸다. 나는 이미 들켜버린 명찰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남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 머릿속에는 이 여자에 대한
경계심보다 그에 대한 걱정으로 매워졌다.
 

나에게 한 짓이라곤 그저 이곳에서
벗어나라고 의미 모를 충고를 해준
것뿐인데.
 

 

타세요. 정신없으시죠?”
 

...”
 

 

가마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바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여인은 사근
사근한 말투로 이것저것 물었다.
 

 

그 남자가 뭐라고 하지는
않던가요?”
 

..여기가 어딘지 제가 물어
보기만 했었어요. 답을 듣기도
전에 이런 사단이 났지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거짓말이 나와
, 나 자신도 놀랬다. 여인은 눈치
채지 못하고 우아한 톤을 유지했다.
 

 

죄송해요. 그는 매우 위험한
존재라, 도망치기 전에 어서 잡아
들여야 했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거름이 될 거랍니다. 저희 세상을
더는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
서죠. 물론 00씨는 현장에 있었어도
대상에서 제외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거름? 죽인다는 개념을 이
세계에선 거름으로 표현하나?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당장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대로 여자는
나를 매우 호의적으로 여기고 있었고
내가 경계를 풀기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 했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나요?”
 

처음엔 낯설고 적응이 되지 않겠지만,
조금만 있어도 여길 천국이라 여길
거예요. 여왕인 제가 장담합니다.”
 

 

꿈치고 설정까지 디테일하네.
여왕이라면, 나는 현재 여기서 가장
높으신 분을 마주하고 있는 거였다.
허나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철썩
같은 믿음 때문인지, 그다지 위압감이나
공포심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튀어나왔던 괴상한 것들이 더 무서워.
 

나는 바깥을 보고 싶어 가마에 나
있는 작은 창문을 호기롭게 열었다.
어찌나 가마를 조심조심 옮기고 있는지,
흙길에 작은 덜컹거림조차 없어서
여전히 탁 트인 전경은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가마는 언덕을
달리고 있었다. 언덕을 넘자 동화책에
나올 법한 성벽이 강을 따라 길게 이어
져있었고 성문은 장정 10명이 와도 못
밀 것 같은 두께를 자랑했다.
 

이게 다 뭐야.
 

 

이곳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성벽 안을 들어가자 남녀 구분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다들 행복해보여서, 극한 상황에
있었던 내가 얼떨떨해졌다.
 

여자는 이런 나를 아주 당연하게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뭐하는 곳이죠...?”
 

당신은, 자신이 사는 삶에서 도피
하고 싶었지 않았나요?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사는 세기가 달라 보이는 사람에게서
교복만 보고 신분을 맞춘다는 건
나에겐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무슨 여왕이 우리나라 교복을 알아?
 

여왕은 더한 말도 내뱉을 수
있다는 듯 나불거렸다.
 

 

여긴 공부의 압박 따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곳이에요. 자신이 보고
싶은 것, 가지고 싶은 것, 모두 가져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죠. 음식도 무한
제공에, 심지어 집도 마련해준답니다.”
 

“....??”
 

 

그런 곳이 대체 어디 있어? 나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아무리 소비자의 욕구를 꿰뚫는다
해도 이건 너무 과대광고잖아.
 

 

저 사람들 전부, 당신과 같은 표정
이었어요. 믿지 못했죠. 그렇지만
하루, 이틀. 자신을 옭매이게 했던
것들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자
다들 즐거워하더군요. 저는 이곳의
왕으로써, 당신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에게서 벗어나게 만들어준답니다.”
 

어떻게요? 어차피 꿈인데...”
 

 

나는 아차 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일반적인 꿈이라면 그들은 내가
이 세계의 공간이 허구임을 자각한
순간부터 나만을 주시 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 내 앞의 허구
적인 존재는 호탕하게 깔깔깔,
입안 속 목젖이 보일 정도다.
 

 

꿈치곤 생생하지 않던가요?”
 

“.....생생했어요.”
 

분명 잠에 들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말씀드릴 건, 이제부터 여기가 현실
이라는 거예요.”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알사탕 같은
알 수 없는 걸 꺼냈다. 그리곤 내게
쥐어주며 씹어 삼키래. 딱딱하지만
그것은 왠지 맛있어보였다. 마법
이라도 걸어둔 것처럼.
 

 

그 여자를 믿지마
 

 

침이 꿀꺽 넘어갔다. 당장의 식욕
이냐, 아님 근거 없는 남자의 조언
이냐? 차피 꿈에 불과한데 한입만
먹고 깨어나면 아무 일 없는 거잖아.
 

 

그러나 여왕의 말이 거슬려서 내
무의식의 세계임에도 선뜻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질문거릴
생각해내어, 사탕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시간을 벌어야했다.
 

 

이게 뭐죠?”
 

제가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사탕
입니다. 이걸 먹으면, 당신을 괴롭
히는 것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
주죠. 맛도 얼마나 좋은지, 달라는
자들이 많아 요즈음 골치가 아프네요.”
 

저를 괴롭히는 게 뭔데요?
저 사람들도 그렇고.”
 

예를 들자면...주변 사람들의 기대,
자격지심, 사회적 이슈, 불운, 사고,
뭐 그런 것들이요. 다들 사연은
제각기지만 그런 이들은 공통적으로
두려워하는 게 있답니다.”
 

어떤...?”
 

“‘내일이요.”
 

 

나는 숲속에서부터 지금까지 꿈, .
일어나면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라
치부했다. 허무맹랑하고 같잖은 소리
들을 필요 없다고, 알면 얼마나 알겠어?
 

하지만 그녀의 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나를 정통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것.
수능이 다가오지 않기를 바란 것.
다시 말해 내일이 오지 않았음
하고 소원했던 것.
 

 

저는 당신들이 내일을 맞닥뜨리지
않게 통로를 열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녀가 바깥을 둘러보는 찰나에,
나는 유혹을 견뎌내고 명찰이
들어있는 주머니에 사탕을 숨겼다.
 

 

손이 덜덜 떨렸다.
 

 

 

 

 

.
.
.
 

 

 

 

 

내가 있는 곳을 제대로 인식하자
모든 것이 무서워졌다. 지금의 나는
어떤 짓을 당해도 악몽이었네.’하고
넘겨짚을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짜 내 몸이 있는 곳의 시간이 얼마
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곳은
해가 저물어 저녁이 되었다. 나는
여왕에게 이끌려 마을 투어를 했고,
식사까지 대접받았다. 음식은 호화
스럽기 그지없었으며 맛까지 있어,
솔직히 양심 없게도 포식을 했다.
 

여왕은 약속한 대로 내가 잘 곳을
따로 마련해주었는데, 집 한 채를
통째로 주는 배짱에 새삼 그녀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오늘 마을을 구경하며 몇 가지 관찰한
결과로는, 사람들은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일들에 치중하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던, 게임을 하던, 제 일에 걸림돌이
되는 건 없었으니까. 저들은 현실세계에
단 한 치의 미련도 없는 걸까?
 

겨우 하루밖에 안 된 나는 벌써
부터 내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오늘 모의고사 성적 나왔지?
한 번 보자. 어디가 부족한지
알아야 과외를 받던 할 거 아니니.”
 

대학은 정했고? ? 아직도?’
 

넌 진로 결정했어?’
 

 

......돌아가지 않아도 되려나?
 

 

나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냈다.
우주를 담고 있는 듯한 무늬가, 나를
다시금 홀리게 만드는 것 같아 주먹을
쥐었다. 내가 있었던 세상을 떠올리면
유독 구미가 당기는 듯한 게, 진짜
마법이라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하다하다 사탕 가지고 골머리를 썩힐
일을 다 보겠네. 혼자만의 싸움을 하고
있던 중,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깜짝 놀라 창가로 달려갔다.
 

 

불이야!”
 

 

사건사고 같은 건 없다며?
여왕의 첫 번째 언행불일치였다.
폭죽이 터진 건 아닌 모양이고,
근처에 화재가 나서 사람들이
바삐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다.
 

나는 나무로 된 대문을 열고 주변을
살폈다. 거들어야하나, 잠자코
있어야할까.
 

눈치를 보고 있던 그 때 대문이
덜컥 고정되면서 눈앞에 사람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낮에 봤던 그 남자였다.
 

 

, 살아 있었어!”
 


 

아쉬운 티 너무 내는 거 아냐?
죽기 살기로 보러왔더니.”
 

 

그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희한하기도 해라.
 

 

어떻게 탈출했어요?”
 

껌이지. 쟤네는 학습능력이 없어서
매번 같은 방식으로 당해.”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는 매우
지쳐보였다. 탈출하면서 여기저기
많이 굴렀는지 성한 곳이 없어서,
일단 안으로 급히 들였다. 남자는
휘청이다 쇼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화약 냄새가 폴폴 풍겨왔다.
 

나는 오늘 처음 배정받은 내 집에
치료할 만한 약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
보았다. 우선 상처에 묻은 흙먼지들을
씻겨내야 한다는 생각에 따듯한 물을
받았고, 동의 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남자는 나의 분주함을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집에 갈 수 있겠어요?”
 


 

도망자 신세에 집이 어디 있겠어,
이런 아늑한 곳에 들어와 보는
것도 엄청 간만이야.”
 

 

교복에 화약재가 묻었다.
엄마가 보면 노발대발할 텐데.
 

 

저기, 조금만 살살하면 안 될까?
치료받다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거든.”
 

여기서 더 어떻게 살살해요?”
 

, 잠깐만!!”
 

 

울상을 짓는 남자. 나는 말로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마음이 약해져 손에 힘을 풀었다.
미숙한 응급처치로 상처가 제대로 나을
지는 미지수라 병원을 권하고 싶은데,
이 사람 처지에 병원은 무리지 싶었다.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 살 것 같다.”
 

 

오늘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특이하고
유일하게 여왕이 싫어하는 사람, 또한
이 평화로운 마을을 혼자서 깽판을
부리는 김태형이라는 남자를 드디어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이는 많아봤자 스물여섯 아래로
보이고,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성격은....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뭐라 정의내리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능글맞으면서도 대담하고,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다짜고짜 호통을 칠
정도로의 싸가지를 뭐라고 하지?
 

 

“....얼굴 뚫어질라.”
 

“!? ,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백 퍼
빨개졌을 거야, 재빨리 몸을 등지고
바닥에 앉았다. 쇼파에 기댄 등 뒤로
그의 킥킥거림이 전해져왔다.
 

나는 교복치마를 괜히 구기며
딴소리를 했다.
 

 

어쩌다 범죄자 신분이 된 거에요?”
 

?”
 

그럼 오밤중에 도망 다니는
사람이 여기 누가 있겠어요.”
 

 

우리는 서로를 칭하는 이름이
따로 없었다. 저기, 그쪽, 당신.
셋 중에 뭐로 하지?
 

그의 이름 석 자를 알지만서도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태형씨?
태형오빠?....‘저기요가 편하겠다.
 

 


 

여기 오자마자 사고치고 다니진
않았지. 나 이래봬도, 아줌마한테
애정 듬뿍 받는 사람이었다?”
 

?”
 

너도 오면서 이미 들어봤을 건데.
이곳을 천국이라 느낄 거라고.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흥청망청
놀기 바빴어. 살면서 해보지 않았던
도박에도 손을 대봤거든. 낮잠도 실컷
자보고, 몇날 며칠 게임으로 밤새워
본 적도 있고.”
 

“......”
 

 

낮잠에서 나는 크나큰 부러움을
느꼈다. 천국이라 할만도 했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부러움을
받아 뿌듯해 보이지 않았다.
 

 


 

근데 어느 날 문득, 허탈함이 몰려
왔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 치트키 써서
게임하면 재미없다고들 하잖아?
진짜 재미없었어. 하는 족족.”
 

난 항상 재밌을 거 같은데.
걱정거리 안 만들고 살면 좋잖아요.”
 

 

공부 걱정 없이 산다는 건 어떤 느낌
일까? 하루의 절반도 넘는 시간을
공부에 바친 내 몇 년을, 뒤로해도
괜찮은 걸까?
 

답은 벌써 나와 있었다.
그 증거로 나는 이곳에 있으니까.
 

 

좋지 당연히. 근데 이만큼의 고민
이나 걱정도 없이 살다보니, 보람도
없더라는 거야. 나를 가로막은 벽을
기어코 깨부술 때의 짜릿함, 난 그걸
다시 느껴보고 싶었어. 너한테 있어
서는 모의고사 1등급 맞았을 때의
기분이라고 하면, 좀 와닿으려나?”
 

그래서 이렇게 도망 다녀요?”
 

. 내가 이곳에서 탈출하면 얼마나
짜릿할지, 그 생각이 드니까 비로소
머리가 팽팽 돌아가더라. 결국엔
아줌마 눈 밖에 나서 이 꼴이 됐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남자도 나와 똑같이
내일이 무서웠던 사람이었다. 나처럼
숲속에서 어리바리하게 돌아다니다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 때 집도
있었다. 그는 여기가 너무 좋아서 현실은
안중에도 없이 지금을 즐겼더란다.
 

만약 내가 숲속에서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당장 내일부터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나는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미지의 장소에 떨어진
것에 대한 무서움과, 내일부터 다시
반복될 무의미한 나날들을 직면할
무기력함 둘 중에서의 선택지를.
 

낯선 것만 빼면 괜찮은 곳인데.
진로도 안 정했는데 차라리 잘
된 거 아닌가?
 

 

넌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
 

저는 원래 있던 곳도 재미없다고
생각해요. 수능만 지나면 된다고
하는데, 그거 친다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건지, 뭐하고 살 건지
정해지는 건 아니잖아요.”
 


 

“.......”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은 따로
있는데, 저는 죽어도 싫거든요.
그렇다고 진로계획서에 적을 게
있나, 백지로 낼 때 느꼈어요.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속마음은 의외로, 깊게
사귄 친구나 낳아주신 부모님, 선생님
보다 생판 남인 사람에게 털어놓을
때 더 편한 경우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엄마 아빠 원망도 했어요.
나 어렸을 때부터 직업을 정해두고
교육 시키지, 아니면 조기교육이라도
해두지. 그럼 이렇게 성적이나 진로로
머리 아플 일은 없었을 거니까요.”
 

“.......”
 

저 되게 못 됐죠?”
 


 

 

씁쓸하게 하하 웃다가,
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남자는 누워있는 상태로 내 얘길
들어주다, 눈을 비비는 나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에, 그만의 위로법이라 생각했다.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지.”
 

같은 말이잖아요.”
 

달라. 참고로 난 여행을 좋아해서,
가보고 싶었던 나라는 꼭 가보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고 했어.”
 

 

그게 뭐야.’ 엉뚱한 소리에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진지한 얼굴이라
태클을 못 걸겠어서, 눈을 내리
깔았다. 남자는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넌 좋아하는 게 뭐야?”
 

전 아이돌 좋아해요.
‘V’ 그룹 아세요?”
 


 

. 노래도 들어봤어.”
 

그 쪽 말대로 어떤 사람이 되겠
냐고 하면, 전 제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에 원 없이 가보는 사람이
되고 싶겠네요. 그러고 보니 수능
끝나면 콘서트 보기로 했는데...”
 

 

수능 끝나면 하기로 했었던 것.
콘서트 외에도 자잘 자잘한 건은
은근히 많았다. 세상 밝은 색으로 염색
해보기, 친구들이랑 교복 입고 이미지
찍기, 피어싱 뚫기, 타로점 보기....
 

모두 공부에 치여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사는데 거창한 이유 있어?
20살 때 일본에 여행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살았고, 22살 땐 전역만
기다리며 살았지. 작년엔 내가 응원
하는 야구팀이 리그 우승하는 걸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살았어.
 


 

사는 게 그래. 정말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다고 여겨도,
자세히 보면 다 의미가 있어.”
 

“.........”
 

네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도,
네가 더 멋진 사람이 되는 과정
이라고 난 생각해.”
 

 

남자의 고민상담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특이했다. 공부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님, 비타민 주사 잘 놓는
병원을 알려주는 엄마 지인, 자신도
힘들다며 같이 늘어지는 친구들 등
많이 봐왔지만 이 사람처럼 접근하는
건 처음이었다. 대뜸 좋아하는 게
무엇이고,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하질 않나.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멈춰있는 나더러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하질 않나.
 

다른 건 몰라도 첫 번째는 수긍했다.
두 번째는, 조금의 위로를 받았다.
 

나는 남자에게 의아해서 물었다.
이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걸까?
 

 

이렇게나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됐어요?”
 

 

남자는 처음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내 질문에 답하기 꺼려하는 듯, 입을
다물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까 나는 서둘러
철회했다. 싫은 건 아니야.’ 그는 상체
를 일으켜 정면을 뚫은 채 이윽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야 여기 와서 깨달았으니까. 나는
이곳에 흘러들어오기 전에 취준생
이었어.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타지에서 올라와
단칸방에서 혼자 살았지.”
 

취업이 잘 안 됐어요?”
 


 

. 매번 낙방했거든. 그래도 계속
도전 하면 된다고,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회사랑 연줄이 있는 애가
붙은 걸 알아버렸지 뭐야.”
 

“...........”
 

세상 참 거지같지. 나한텐 여러
모로 마지막 도전이었는데 말이야.”
 

 

초긍정으로 세상을 살 줄 알았던
남자는 예상외의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는 나와 다른 경로로
이곳에 왔다고 해.
 

 


 

그래서 목을 맸어.”
 

 

자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짓
이라고 했다. 나는 덤덤하게 말하는
그와 달리 충격을 먹었고, 담담히
이어서 말하는 그의 뒷이야기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면, 그는 목을 맨 시점부터
이곳에 왔기에 제 몸의 상태가 죽었
는지 살았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었고
이 마을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었다.
 

죽은 몸이라면, 탈출이 무슨 소용
이 있어요?’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채근하자, 그는 남 이야기하듯
쉽게 대답해주었다.
 

여기보단 낫지 않겠어?’라고.
 

 

 

 

 

.
.
.
 

 

 

 

 

나는 낯선 곳에 오면 잠에 쉽게 들지
않는 체질이라, 집 밖에 고요에 휩
싸인 시간에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남자는 아까부터 숙면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시계가 없구나.
하긴 내일이 없는 이곳에서 시간은
필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담 현실시계의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내 빈 껍데기는 병원에
실려 갔으려나? 엄마랑 아빠는...
내 걱정 많이 하고 있겠지?
 

 

“!”
 

 

현실의 내 몸뚱아리를 걱정하다
깜박 졸았다. 아니, 졸았다고 생각
했는데 기절을 해버렸다. 눈을 뜨니
장소가 침실로 바뀌어있는 걸, 이불을
걷어내곤 잠시 동안 벙쪄있었다.
 

쿵쿵쿵, 집 대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정신이 돌아와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대충 머리를
질끈 묶고 침실에서 나와 거실을 지나
는데 쇼파에서 잤던 남자가 없었다.
어디 갔지? 설마 문 밖에 있는 사람
인가? 긴가민가하며 대문을 열었다.
 

 

“000씨 되십니까?”
 

 

수염이 있는 서른 남짓한 아저씨가
서있다. 복장이 이곳의 성내 안에서
입는 유니폼이다. 여왕이 보낸 사람
이구나, 나는 단번에 파악했다.
 

 

여왕님의 저녁 식사 초대장입니다.
일몰이 지는 무렵에 데리러오라
하시더군요. 그 때 뵙겠습니다.”
 

, ...”
 

 

인장이 박힌 초대장을 두 손으로
받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여긴
컴퓨터 게임도 있고 전자룰렛도 돌리
면서 초대장은 구식에 머물러 있네.
희한한 동네야, 하며 문을 닫았다.
 

 


 

아줌마가 너 굉장히 좋아하나봐?”
 

깜짝이야. 어디 있었어요?”
 

 

남자는 바로 내 뒤에 기둥을
기대어 서있었다. 그의 손에는
주방기구들이 잡혀 있었다.
 

 

점심 식사 준비. 나 며칠간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굻어죽을 뻔 했거든.
네 집 냉장고 신세 좀 질게.”
 

집주인 바뀐 기분 저만 들어요?”
 

밥 먹자!”
 

 

그는 딴청을 피우며 요리를 계속
했다. 자취 오래 했다더니 짬이
꽤 되는가봐. 어제의 만찬은 아니
지만 음식을 보니 배가 고파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 초대장을 옆에
두고 수저를 들었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밥이 술술 들어갔다.
남자는 배고프다면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어, 일부러 헛기침을
큼큼대며 대화를 만들어냈다.
 

 

여왕을 아줌마라고 불러요?”
 

. 부르는 건 내 마음이잖아.”
 

그래서 찍힌 거 아니에요?”
 

설마.”
 

 

진짠가?’ 그의 고개가 갸웃거린다.
사실 아줌마라고 부르지 않았어도
찍혔을 운명 같았다. 어제 보니까
골리는 거 엄청 잘하던데.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모르네.
내 이름은 어제 아줌마가 말해서
알고 있으려나?”
 

. 김태형이라고 하던데.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너 편한 대로.”
 

제 이름은 000예요. 그 쪽도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 00.”
 

 

그는 단번에 내 이름을 불렀다.
, 나야 상관은 없지만 저렇게
바로 부르기 어려울 텐데.
 

나는 이름 얘기에 어제 주머니에
숨겨놓았던 명찰을 다시 달려고 했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손을 빼 펼치니
실밥이 묻은 명찰 말고도, 어제의 최
대 난관이었던 유혹의 사탕이 나왔다.
 

때마침 잘 됐다. 나는 그에게
사탕을 보여주었다. 평소 사탕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것만 보면
침을 꼴깍 삼키는 게 궁금해서였다.
 

 

, 여왕이 이걸 줬는데요.
혹시 아세요?”
 

사탕이잖아! 용케 안 먹었네?”
 

그쪽이 믿지 말라면서요.”
 


 

착하네~”
 

 

남자는 나를 칭찬했다. 이게
뭐라고, 나는 쑥스러워져
맘에도 없던 물을 마셨다.
 

 

이곳의 음식들은 되도록 먹어도
되지만 사탕만큼은 피하는 게 좋아.
무슨 성분인지 몰라도 먹으면 기억이
흐려져. 현실에 있었던 기억들이
싸그리 없어진다는 소리지.”
 

여왕은 사탕이 저를 괴롭히는
것들을 완화시켜준다고 했어요.”
 

맞는 말이야. 너가 여기 오면서
두고 온 인연들, 추억들은 여기서
즐겁게 놀 때 발목을 잡게 될
거거든.”
 

 

여왕은 현실세계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든 이곳 사람들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수를 쓴 게 기억을 없애버리
는 거라니. 나는 사탕을 요리조리
살피다 문득 맛이 궁금해졌다.
 

 

사탕 먹어봤어요?”
 

. 꿀맛이던데?”
 

“!?!? 해로운 거 알면서요??”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면서 일부러 먹었어.
새 삶을 시작하고 싶었으니까.”
 

 

난 안 먹어서 이곳 생활에 제대
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사탕을 먹으면, 난 제일 먼저 어떤
기억부터 사라질지 호기심이 들었
지만 감히 모험은 하지 않기로 했다.
 

 

,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네가 왔었던 통로가 그대로라면
탈출할 수 있지. 만약에 통로가
없으면, 그 다음 길이 열릴 때까지
여기서 살아야해.”
 

그쪽은 얼마나 있었어요?”
 

몰라. 체감 상 1년은 있었던 기분
이긴 한데, 더 머무를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가 불사신도 아니고, 이렇게
살다가 거름되는 건 시간문제니까.”
 

거름이 뭐예요?”
 


 

어제 봤던 시커먼 애들 있지? 여왕
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애들을
그렇게 만들어버려. 가령 기억이
완전한 사람이라던가, 자신의 기준에
벗어나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나,
혹은 나같이 반발하는 사람들을.”
 

저도 그럼 거름 대상이겠네요.”
 

아직은 아니지. 하지만 계속 사탕
을 거부한다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얼른 여기서 나가야
. 너 티켓팅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수능부터 치고요.”
 

 

나는 실소가 터졌다. 남자도
같이 웃었다. 여기에도 V그룹이
존재했더라면, PC방에서 티켓팅 도와
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저녁식사 초대받았지?
 

.”
 


 

그거 꼭 가. 아마 방금 먹은
밥이 전혀 생각 안 날 만큼
맛있을 걸?”
 

“1분 전에 여기서 빨리 나가라고
하신 분이 초대장을 왜 챙겨요?”
 

그야 탈출시켜주려고 그러지.
가보면 알게 돼.”
 

 

알쏭달쏭한 말만 하는 남자는
왕실에서 나를 데리러올 시간보다
이른 때에 집을 나갔다. 나는 그
동안 어떤 계획이냐고 계속 추궁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가 내게 남긴 말은 나를 꼭 데리
러올 것이라는 것과, 가서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상한 남자.
신기한 남자.
 

그런데도 나는 그를 이번에도
믿었다. 하루 만에 이루어진
신뢰도치곤 많이 굳건한 편이었다.
 

 

 

 

 

.
.
.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왕실에서
꽤 사랑받고 있는 편인가보다.
저녁식사 대접도 겉치레라고만 판단
했는데 나는 무려 여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여왕은 나를 살뜰히
챙겨주었다. 내 옆으로는 그녀의 최
측근들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음식들은 끊임없이 식탁에 올려졌다.
 

 

하루 동안 있어보니 어떤가요?”
 

...아직 낯설어서 그렇지 지나면
굉장히 편하다고 생각해요.”
 

“00씨가 그렇게 생각해주니 기분이
좋군요. , 어젯밤에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00씨 집은 괜찮았나요?”
 

? ...!”
 

 

이 정도면 거짓말 대회 나가서
1등도 먹지 않겠어? 아님 여왕이
더럽게 눈치가 없다던가.
여왕은 항상 고집하는 화장법이
있는 듯 했다. 진하고 화려한 메이
크업, 거기에 음식 냄새에 섞여
드는 지독한 향수 냄새까지. 나는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을 것 같다.
 

 

디저트를 내오거라.”
 

.”
 

 

식사 시간이 제발 빨리 지나가기를,
나는 빌고 빌며 고기를 썰었다.
그 때, 다이닝 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 남자인가?
 

두근대는 마음을 가라앉히다가
마침내 열리는 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가 기대하던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거름에게 양 팔을 붙잡혀 바둥대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이곳이
떠나가라 엉엉 울고 있었다.
 

 

살려주십시오!!! 제발!!”
 

 

여자는 여왕에게 애원했다. 사정을
모르는 나는 여왕의 심기를 살피고
있었다. 이로써 여왕의 두 번째
언행불일치였다. 다들 행복하게
잘 산다며?
 

 

어디 식사하는데 예의 없이.
빨리 끌고 가버리거라.”
 

여왕님!! 저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여왕은 귀찮아하며 와인을 홀짝
였다. 아무도 저 여자의 최후를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속이 메스꺼웠다. 여왕의
향수냄새 때문이 아니라, 저 여자
의 절규에 나까지 비틀리는 기분
이었다. 저 여자가 거름이 되는 건,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아서인가?
 

이유가 어찌됐건 가만히 있다가는 여자
는 옆의 시커먼 괴물이 될 것이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마.’ 낮에 일러두
었던 남자의 충고가 떠올랐지만, 나는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에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잠시만요!!!”
 

“?!”
 

왜 끌고 가려는 거예요?
가족이 보고 싶다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사고 쳤다, 후회는 일을 치고
나서야 밀려들었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지?
 

여왕은 나의 돌발 행동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온함을
유지하고 논리정연하게 따져왔다.
심지어 끌려가던 여자도 깜짝 놀란
듯 커진 동공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저 인간은 가족을 등지고 술에만 의지
했어요. 그리고 매일 세상을 비관하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고, 그토록 원하던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게 되었죠.
그런데 이제 와서 가족이 보고 싶다니?
돌아간다 하더라도 가족이 과연
그녀를 반겨줄까요?”
 

그건...! 당신 생각이죠. 저 사람이
왜 세상을 비관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족의 그리움을 깨달았으면 보내
줘야 하는 게 맞아요. 애초부터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잖아요!”
 

김태형과 똑같은 소릴 하는군요.
어제 김태형이 당신 집에 숨어
들었던 게 사실일 줄이야.”
 

 

나는 발끈했다. 나대도 적당히
나대려던 게 과부화가 걸려버렸다.
 

 

그 사람을 안 만났어도 저는 똑같은
말을 했을 거예요. 비록 수능 치기
싫어서 여기 왔지만, 당신처럼 끝까
지 내일을 피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영원히 도망다니는 거랑 뭐가 달라요?”
 

 

다다다 쏘아붙이는 말에 여왕은 화가
나 일어났다. 드르륵 밀려 넘어지는
의자 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찔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기엔 이미 그른
것이니 오기로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패기는 좋아 보이지만, 당장 내일을
맞이하면 또다시 새벽까지 공부하고,
자소서를 써야할 텐데. 목표도 없이
그렇게 살아도 괜찮겠어요?”
 

“.... 그렇게 살 겁니다.
언젠가 반드시, 목표가
생길 거니까요.”
 

“.........”
 

 

나는 내 입으로 직접 내뱉으면서
비로소 남자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진로를 못 정해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
던 시간들, 그저 남들이 높게 평가하는
등급을 받기위해 아등바등했던 나날
들이 실은 내가 커가는 과정이라는 걸.
 

별 볼일 없는 하루가 아니었어.
 

 

그럼 당신도 거름행입니다.
우리 만남도 여기까지군요.”
 

“! , 잠시만!”
 

 

여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괴물
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무슨
배짱으로 대들었나, 마치 당장이라도
현실세계로 돌아갈 것처럼 굴어놓고
이리 힘없이 끌려가는데.
 

 

아니요.”
 

 

특정 인물의 목소리에 여왕의 눈
초리가 사나워졌다. 싸해진 분위기에
더욱 찬물을 끼얹으며 나타난 남자는,
내게 들러붙은 괴물을 떼어내곤 장난
스레 어깨동무를 했다. 그럼과 동시에
지진이 나면서 폭발음이 펑! 어제
들었던 폭죽소리와 동일했다.
 

 


 

“00는 저랑 갑니다. 아줌마.”
 

 

혼비백산에 아수라장, 어떤 수식어
를 붙여야 이 난리판을 설명할 수
있을련지. 후두둑 떨어지는 잔해에
나는 남자에게 어서 무슨 짓을 저질
렀는지 해명하라고 팔꿈치로 그를 건
드렸다. 물론 가볍게 무시당했지만은.
 

 


 

연말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 보러가야한대요.”
 

네놈이 또 공장을 건드렸구나!”
 

헤헤, 앞으로는 공장 터질 일
없을 겁니다. 그리울 거예요
아줌마.”
 

그립다고...?”
 

당연히 구라인 거 아시죠?”
 

빠져나가게 둘 것 같으냐!!”
 

 

, 같은 편인데 진짜 얄밉다.
나까지 속을 뻔했잖아.
 

남자는 혼란을 틈타 내 손을 잡고
쏜살같이 궁전을 빠져나왔다. 내부
구조는 여왕보다 더 잘 아는 거 같아,
뒷길을 어찌나 잘 파악 해놨는지
도망가는 내내 따라붙는 이가 없었다.
 

계속 이렇게 가면 좋을 텐데.
 

 

공장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사탕 만드는 곳. 거기가 폭발에
엄청 취약하거든. 사탕의 원재료 되는
게 화기에 닿으면 순식간에 터져버려.
네가 가지고 있는 사탕도 먹지 않고
부수면 폭발물이나 마찬가지야.”
 

공장 가지고 자주 속을 썩였던데,
몇 번째 폭발이래요?”
 

전에 있었던 건 다 실험이지.
이번 일을 위한.”
 

 

강줄기가 약한 곳을 미리 봐둔 그가
먼저 강을 건넜다. 그는 이 일을
꾸미기 위해서 얼마나 잡혀 들어
갔고 또 얼마나 많은 탈출을 했었을
,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강을 건너자 숲이 나왔다. 다시
되돌아가는 느낌이 선명해져간다.
뒤로는 연기가 만든 검은 구름에
갇힌 성이 매캐한 악취를 뿌려댔다.
 

 

“.....”
 

 

이대로 성공적으로 통로를 지나고
원래대로 돌아가게 되면, 이 사람
과는 이렇게 헤어져버리는 걸까.
 

어떻게 보면 생명의 은인인데 각자
할 일 하며 살기에는 아까운 인연
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깨어나면 여기 있었던 일들,
기억하겠죠?”
 


 

솔직히 기억 못하는 건 오바다.
내가 얼마나 생고생을 했는데.”
 

나가면 제일 먼저 뭐할 거예요?”
 

? 만약 죽은 거라면 편안히
쉬고 싶고, 기적처럼 육체가
있다면 기꺼이 열심히 살아줘야지.”
 

우리,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는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지
못하는 나를 위에서 잡아당겼다.
그 덕에 그에게 바싹 붙어버린 몸이,
전기라도 닿았는지 별나게 반응해.
남자는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
들을 치우며 피식 웃었다.
 

 


 

이런 곳에서도 만났는데 우리
나라에서 못 만날까. 내가 살아
있단 가정 하에, 꼭 찾아갈게.”
 

저도요.”
 

넌 수능부터 치시구요~”
 

 

내 말투를 흉내 내는 그에게
따라하지마요.’라고 했더니
더 과장되게 따라한다.
 

얄미워!
 

 

해가 거의 지고 어둠이 깔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자 속도가 더뎌졌지만,
우리는 마침내 내가 왔던 통로를
찾아냈다.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흡사 동굴처럼 생겼었다.
 

 

통로다!”
 

아직 있었네.”
 

 

우리는 반갑게 달려갔다. 떠나기
전에 작별인사라도 건네야겠지,
나는 옆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나 시야에는, 그 말고도
여럿이 있었다.
 

 

내가 말했지. 쉽게
탈출하게 둘 거 같냐고.”
 

“!!!!”
 

 

숲 속에서 불이 켜지며 환하게
다가오는 무리의 중심에는 여왕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를 죄여오는
괴물들은 어제에 비해 훨씬 수가
많았고, 우리는 뒷걸음질 쳤다.
 

 

네가 나에게 모욕감을 준 것처럼
나도 한 번 무대를 꾸며봤는데
마음에 들었음 좋겠구나. 주인공
들도 왔겠다, 이제부턴 내가 통로를
없애버릴 계획이거든.”
 

 

그녀는 스위치를 꺼내들었다.
기폭장치로 추정되었고, 기폭제는
통로 입구에 설치가 되어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하며 연신 어떡해
를 남발했다. 진짜 어떡해, 눈물
나올 거 같아.
 

 

“00.”
 

...?”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고 잘 해줄 수 있지?”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선택지가 없는 건 오늘도 똑같아.
나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앞만 보고가.
통로가 곧 무너질 거야.“
 

그 쪽은....!”
 

어디 꼼수를!”
 

 

나는 그에게 밀쳐졌다. 단숨에
입구를 넘어버리며 땅을 구른 내
몸은 그가 당부한 것과 다르게 움직
이지 않았고, 무릎의 쓰라림에도 불구
하고 내 눈은 그를 향해 있었다.
 

 


 

뒤따라갈게.”
 

 

쿵 소리가 났다. 입구가 무너져
내리면서, 나는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낙석에 부딪쳐버렸다.
먼지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안 돼. 안 돼....!”
 

 

나는 그제야 그의 이름을 외쳤다.
김태형! 오빠! 들리면 대답해!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단절된 듯, 깜깜한
공간 속 거친 내 숨소리만 울렸다.
 

누구보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했잖아. 왜 그랬어, ....!
 

돌을 치워보려고 힘을 쓰지만
역부족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동안 거름이 돼버림 어떡하지?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린다.
흐느낌이 깊어지고, 흙 범벅인
손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을 울었다.
 

이게 마지막일 리가 없어.
다시 만나기로 했잖아.
 

돌에 긁혀 손끝에 피가 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어서, 계속
파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이것밖에 안 돼?
 

 

“.......사탕....”
 

 

혼잣말을 중얼대며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갑자기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그의 목소리.
 

 

사탕의 원재료 되는 게 화기에
닿으면 순식간에 터져버려. 네가
가지고 있는 사탕도 먹지 않고
부수면 폭발물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주먹만 한 돌을 찾아 사탕을
무지막지하게 박살을 냈다.
영롱한 빛을 띄우던 사탕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뒤, 그것을 모아 무너진
틈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원시
적인 방법으로 돌 두 개를 가지고
맞부딪치며 불씨를 일으켰다.
 

, ,
 

폭발을 내면 잔해물들이 사라질
거라는 계산을 믿고 열심히 돌을
교차해대던 나는, 손에서 반짝
하고 빛이 나는 걸 봤다.
 

불씨다!
 

 

“.......!”
 

 

그 순간 나는 경기를 일으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방이었다.
 

창가에는 새벽빛이 드리우고
있었고, 째깍이는 시계초침이
귓가에 어색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다.
원했지만, 원하지 않았던.
 

 

얼른 불을 켜고 아무 종이나 찢었다.
그의 말대로 생고생을 얼마나 했는데,
벌써부터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며 종이에 펜을 휘갈겼다.
그의 이목구비, 옷차림, 머리색깔,
이름, 목소리.......
 

그리고 다시 꿈을 꾸게 된다면
종이에 적은 인상착의대로 그를
찾아내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
 

 

제발...”
 

 

나는 그렇게 혼자
내일을 맞이했다.
 

 

 

 

 

.
.
.
 

 

 

 

 

거짓말처럼, 나는 이후로 단 한 번도
같은 꿈을 꾸지 못했다. 그 쪽 세상에서
나의 이름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그
곳으로 가는 통로는 열리지 않았다.
 

어느새 종잇조각이 세월을 먹어
노래질 때까지, 내가 대학생이
되어 졸업을 앞두기 까지.
 

설령 내가 붙인 불씨에 폭발이
일어나 통로가 다시 생겨서 그가
탈출했다 해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우리는 번호를 교환한 사이도 아니고
달랑 이름만 알고 있을 뿐이니까.
 

 


 

단지 나는 떨쳐 내버릴 수가 없었다.
뒤따라갈게.’라 말하며 나와 시선이
닿은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애써 절박
함을 떨쳐버리고 통로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 간절함이 너무도 아파서,
나는 외면한 채 살 수가 없었다.
 

 

수능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백 일도 안 남았어요.’
 

, 벌써 그렇게나?’
 

 

그는 생사가 걸린 탈출을 앞두고
서도 나를 위해 두 손을 모았다.
 

 

시험, 잘 치도록 내가 기도할게.’
 

 

 

 

 

 

.
.
.
 

 

 

 

 

<4년 후>
 

 

 

드디어 간다니까~ 가서 애들
실물 실컷 담아올 거야. 완전 떨려!”
 

 

서울의 한 실내경기장 앞. 커다란
건물에 내걸려진 아이돌 멤버의 개별
사진 아래로 개성 있는 플랜카드들을
든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내 옆에서 통화를 하는 여자의
대화에 무척이나 공감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23살이 되어서야 티켓팅에 성공
했다는 것이었다.
 

그 어마어마하다는 대학 경쟁률도
뚫고 왔건만 매번 티켓팅에서는 고배
를 마시게 되던지. 그래도 몇 번 실패
한 경력이 있다 보니 그 짬을 활용해
이번 년도에는 드디어 성공할 수 있었다.
 

 

사람 디게 많아...”
 

 

V그룹을 나만 파다 보니 아는 사람
한 명 없이 혼자와 그저 휴대폰만 보며
대기시간을 기다리는 나는, 나와 같은
팬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준비해
왔는지를 관찰했다.
 

내가 준비한 건 쨉도 되질 않네.
보면서 느낀 총평은 그랬다.
 

 

“......”
 

 

연말에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
콘서트 보러가야 한대요.’
 

 

처음 콘서트를 보러갈 거라고 한
19살이었는데, 이제야 왔네.
19살의 나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시기를 보냈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오래된 종이 한 장으로
설명이 다 돼.
 

19살 후반은 극도로 예민했었다.
이유를 모르는 부모님은 공부는
때려치우고 잠을 자려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심지어 병원까지
데려갈 정도였으니까.
 

20, 21, 22, 한 해가 지날
수록 나는 점점 담담해졌지만
종이를 버리지는 않았다.
 

남아있는 미련이 나에게는 너무나
커서, 덜어내기에는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거라는 건 예전에
진작 알아차린 부분이었다.
 

 

...?”
 

 

나는 까치발을 들었다.
 

‘V'그룹은 인기가 꽤 많았는데 남자
아이돌 중에선 남팬이 없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콘서트장에서 남자가 지나
다니면 경호나 관리자가 아닌 이상
주목을 한 몸에 받곤 했다.
 

 


 

 

그치만 희귀한 남자팬이라서,
아니었다. 내가 아는 뒤통수였다.
 

나는 사람들을 헤집고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부딪쳐도 미안
하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시선이 딴 곳에 가있었다.
 

 

“......김태형.”
 

 

 

우뚝 멈추는 뒤통수에 대고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랑곳
하지 않고 또다시 이름을 외쳐,
겨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실물로 봤을 때처럼 주체할 수
없는 심장박동에 불규칙적으로
숨을 골랐다. 이런 나를 본다면
그는 제 성격대로 골렸을지도.
 

 


 

“........”
 

 

4년이란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그대로였다. 나에게 꽂힌 그의
눈빛이 흐려지다 선명해졌다.
 

그의 입 꼬리가 예쁘게 휜다.
 

 

수능은, 괜찮았냐?”
 

 

보고 싶었어요.’
이 말을 할 수 있음에,
 

눈부시게 행복했다.
 

 

 

 

 

 

-END-
 

 

 

.
.
.
 

※만든이 : 콩이님 

 

<>
 
 
참고로 000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V’는 남주의 활동명에서
따온 거라 허구에 불과합니다.
특정 그룹이 아니라는 점!
 
또한 번외는 없습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마무리를 지을게요
비하인드가 있다면 태형이는 여주가
다시 길을 열어줘서 나올 수 있었
다는 거? 그리고 설정으로는 태형이
는 매년 티켓팅에 성공해서 콘서트를
갔다는 거지만 번외로 내기에는 너무
짤막해서 생략하기로 했습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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