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기억 조작 [단편] (by. 로웨나)



his.
여자 아이는 어느 날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내 앞에 나타났다.
 
 
 
그 날은 비가 내렸다. 구멍 뚫린 듯 쏟아지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무시하기에는
 옷이 홀딱 젖을만한 날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석이 진작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건, 아침에 집을 나설 때에는 분명 비가 오지 
않았으니까. 우중충하고 꾸물꾸물한 날씨라고
 생각이야 했다지만 거기서 그칠 뿐, 당장 오지 않는
 비에 우산을 챙길만큼 꼼꼼한 성미는 민석이 태어날 때 
엄마 뱃속에 두고 온 지 오래였다.
 

 
"학교 끝나고 한 판 더 해
이대로는 집에 못 가. 또 해!"
 
 
 
점심시간 마다 민석과 종인, 찬열은 운동장을 점령한다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종인과 민석의 팀으로 
나누어 축구를 즐기던 차였다.
 
 
 
보통 예비종이 치기 직전까지 점수를 많이 내는 팀이 
이기는 룰인데 팀원은 날마다 랜덤으로 정해지기 
때문에 이기고 지는 팀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잘하는 아이가 몰빵으로 들어가 있는 팀이
 이기는 거다.
 
 
그런데 오늘은 종인의 팀이 열세였는지 월등한 
점수 차로 민석의 팀이 승기를 잡았다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종인이 눈을 부라렸다.
 
 
 
"종인이 장래 희망이 오뚝이야? 넘어져도 자꾸자꾸 
일어나는 모습이 참 인상 깊네."

"말을 왜 그런 식으로 해? 학생회장 같게."

"나 학생회장 맞아."

". 그래서 좇같다는 뜻이야."
 
 
 
푸흐-. 난데없는 콩트에 축구공을 농구공마냥 바닥에
 튀기던 찬열이 배꼽을 붙잡고 자지러졌다.
 
 
 
찬열은 웃을 때 양쪽 눈썹을 비스듬히 내리고 눈을 
반쯤 감고 웃는데 그 때문에 얼굴이 찌그러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찬열을 보던 민석은 볼 때마다
 참 가슴 아파지는 외모라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종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학생회장의 권한으로 종인이 벌점 3.
사유는 욕설 및 명예 훼손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종인에게 보여주었다.
 
 
 
욕하면서 웃는 민석의 표정은 평소에 종인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라 일부러 그랬건만 축구에서
 졌을 때에는 그런 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알겠으니까 수업 끝나고 축구해. 종인이 말했다.
민석이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자 축!!
한 글자 한 글자 스타카토로 끊어서 말해준다.
 
 
 

 
 
"독한 새끼."

 
"미친 새끼."
 
 
교실이 가장 먼 종인이 서둘러 사라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민석과 찬열이 중얼거렸다
예로부터 미친놈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들은 이미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그들은 종인과 친구하기로 한 과거의 저를 납치하고
 싶은 심정을 공유한다. 쌓여가는 벌점보다 내기도 
뭣도 걸려 있지 않은 승부가 더 중요한지 민석의 
벌점 발언에는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저런 미친놈에게 더 이상 웃어주는 것은 
제 능력 밖이므로 웃는 얼굴을 거두고 만다.
 
 
 
 
 
 
 
 
 
 
 
his.
 
승부에 목숨을 건다고 해서 페어플레이 정신까지
 함양한 것은 아니었다. 각종 반칙과 꼼수가 
무하는 더티플레이를 펼치고 위너가 된 종인이
 운동장 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그런 종인의 머리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 비 오나 봐."
 
 
 
종인이 낭패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부터 비올 것 같은 하늘이었어. 축구만 안 했어도
 뽀송뽀송하게 집에 갈 수 있었는데."
 
 
 
이게 다 네놈 새끼의 그 거지같은 승부욕 때문이라며 
종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찬열이 조용하더라.
 
 
자신 못지않게 종인을 저주해야 함에도 말이다
민석은 고개를 돌려 찬열을 본다.
 
 
 
"나는 우산 있어."
 
 
 
왓더? 민석이 눈을 번뜩인다.
 
 
 
"나 오늘 우산 좀 씌워줘."
 
 
 
찬열에게 잘 보여야 그렇게 해롭다는 산성비를 
피할 수 있다. 미세먼지가 판을 치는 이 계절에
 저 비를 온 몸으로 맞았다간 조금 과장을 보태서
 에이즈를 제외한 모든 병에 걸려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제가 오늘 찬열에게 밉보인 게 있었던가. 아마 없다.
 
 
 
"너희 집 우리 집이랑 반대 방향이잖아."
 
 
 
찬열이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내비춘다.
찬열은 아무리 밉보인 게 없더라도 잘 보인 것도 
없으면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잊었었다.
 
 
 
참 비즈니스와도 같은 우정이 틀림없다
그와의 관계를 두께도 매길 수 있다면
 한지 한 장보다 얄팍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 얼마 전에 VIP로 등업했어. 무제한 다운로드 
이용권 보유자야. 내 아이디랑 비번 너랑 공유할게."
 
 
 
정확한 목적어를 말하지 않었지만 무엇을 말하는 
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찬열은 학생회장의 감투를 쓰고 거리낌 없이 청소년
 관람불가 영상으로 로비를 시도하는 민석을 본다.
 
 
 
"학생회장이라는 놈이 친구를 그렇게 나쁜 길로
 인도해도 되는 거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말하기는
그리고 이게 왜 나빠. 나는 나중에 어차피 할 거 
미리 예습하는 것 뿐이야."
 
 
 
시각적 예습은 곧 경험. 요즘 세상에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데. 경험은 다양하고 많을수록 좋지
다다익선. 민석이 말했다.
 
 
 
그런 민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찬열이 문득 종인이
 잠잠하다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나도 우산 있어."
 
 
 
찬열이 민석을 본다. 표정을 보니 
이미 의욕이 바닥을 친다.
 
 
 
"오늘 비와서 어둡고 무서워. 아주 그냥 납치 영화에 
딱 어울리는 배경이야. 박찬열, 집에 같이 가."
 
 
 
지랄. 그냥 심심한 거면서. 나를 엿 먹이고 싶거나
민석이 다 들리게 중얼거리자 찬열이 민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아마 둘 다일 거야."
 
 
 
 
죽고 싶냐. 떨어져.
 
잠시 투닥대다가 굵기를 더해가는 빗줄기에 
자연스럽게 종인과 찬열은 함께
민석은 반대편으로 외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종인의 등급은 VVIP. 민석보다 혜택이 많다
한지 한 장의 우정은 그 날도 어김없었다.
 
 
 
 
 
 
 
 
 
 
 
his.
 
어차피 비에 젖을 거 땀이라도 닦을 겸
물도 마실 겸 수돗가로 향했다.
 
 
 
그 사이에 좀 그쳤으면 했는데 세수를 하고 머리를
 물에 적셔 더위를 치워내도, 목을 축이고 물에 젖은
 옷매무새를 정리할 때까지도 빗방울은 여전했다.
 
 
떨어지는 물방울과 바람에 일렁이는 웅덩이를 
수돗가 지붕 아래에서 가만히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신발끈을 제대로 묶는다. 뛰어가면 비를 좀 덜 
맞을지도 모르니까. 젊다 못해 어린 이 나이에
 탈모라도 걸렸다가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멈춘다
이미 끔찍하다.
 
 
헤어지기 전 민석에게 종인은
 
 
 
'너는 키가 작으니까 빗방울이 네 몸에 닿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거야. 오늘 같은 날은 좀 부럽다.'
 
 
 
이 따위 개소리를 남기고 떠났다. 오늘만큼 중력이 
미운 적이 없었단다.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웃는 
찬열은 덤이었다.
 
 
그 때야 있는 욕 없는 욕 다 해가며 살인 예고를
 날려댔지만 지금은 그 말에 희망을 좀 걸어보기로 했다.
 
 
 
 
스타트건의 소리를 기다리는 육상 선수처럼 반쯤 
허리를 굽혔다. 집까지 쉼 없이 달려야 하니 
이제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된다. , , ㄴ….
 
 

 
"……."
 
 
굽혔던 허리를 다시 곧추 세웠다. 민석은 갑자기 
제게 내밀어진 빨간색 3단 우산 끝을 의아헤게 
바라보다가 손잡이를 쥔 작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여자 아이다. 명찰을 보니 2학년.
 
 
 
"우산 펴 달라고?"
 
 
 
내버려두다간 가는 팔이 떨어질 것만 같아 우산을 
받아들며 물었다. 얼핏 봐도 손잡이 가운데 버튼이 
달린 자동식 우산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편하다며 자동식 우산을 들고 다니는 여학생들을 
많이 봤는데 보기보다 뻑뻑한 버튼 때문에 우산을
 잘 펴지도 못하는 것을 간혹 봤다.
 
펴지 못해서 쓰지 못하면 예쁜 쓰레기에 불과한데 
참 고집스럽게도 들고 다닌다.
 
 
 
버튼을 힘주어 눌러 팍-하고 펴진 우산을 다시 건넸다.
 
 
 
", 받아. 접을 수는 있지?"
 
 
 
다시 뛰어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가 
팔뚝 언저리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저 이거, 쓰고 가시라고 드린 건데."
 
 
 
활짝 펴진 우산을 다시 내밀더니 저보고 쓰고 가란다.
테두리에 둘러진 레이스 덕분에 개화한 꽃으로도 보인다.
 
 
 
민석이 아이를 찬찬히 살피니 그 우산 말고는 
다른 우산도, 비를 피할 천 쪼가리 하나도
 들고 있지 않다.
 
 
 
"나 알아?"
 
 
 
경우 없이 시비걸 듯 물어본 게 아니다
나는 너를 오늘 처음 보는데 너는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단지 그런 생각에 궁금해서.
 
 
 
혹시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인연이 있었는데 기억을
 못하는 거라면 정말 미안할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학생회장 선배님이신 건 알아요
근데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긴 한데."
 
 
 
민석의 의도야 어쨌든 아이는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당황스러움과 뻘쭘함을 감추지 못한 채 양손을 맞잡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대는 모습이 꼭 미어캣같다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카락도 옅은 
자연 갈색이라 더 그렇다.
 
 
 
"미안.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걸 쓰고 가면
 너는 비맞고 갈까봐 걱정돼서 물어본 거야."
 
 
"."
 
 
꼭 맞물린 미어캣의 손을 직접 끌어와 우산 손잡이를 
돌려 주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움찔하던 그녀의
 어깨에 잠시 시선이 머물렀다.
 
 
"난 뛰어가면 돼. 이거 쓰고 가. 감기걸려."

"……."
 
 
 
그리고 그제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미어캣은 두 손으로 우산을 잡느라 미처 
발그레해져 버린 양볼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큰 감흥을 준 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제게 연심을 품은 이성은 많았고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오늘이 초면인 미어캣이 알고 보니 나에게
 관심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his.
 
오늘 아침은 유독 눈이 일찍 떠지는 날이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건만 평소와
 다름없이 집안은 고요했다.
 
 
 
새벽같이 출근한 부모님이 미처 텔레비전을 끄는 것을
 잊어버렸는지 기상 캐스터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거실에 낮게 깔린다
 
 
 
 
 
민석은 토스트기에 식빵 두 조각을 끼워 넣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200ml 우유를 
냉장고에서 골라냈다. 토스트가 바삭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창밖을 응시한다.
 
 
 
일기 예보를 굳이 보지 않아도 안다. 어제와 다름없이
 하늘은 꾸물꾸물하다. 비비람까지 부는 것을 보니 
이런 날씨에 3단 우산은 뒤집어질 게 뻔하다.
 
 
 
 
물 부족 국가라지만 뒤집어진 우산에 빗물을 받아 
수도세를 절약할 생각은 없으니 튼튼한 장우산을
 꺼내 현관에 세워둔다.
 
 
 
 
 
 
 
 
 
 
 
his.
 
보통은 조회 시작 10초 전 아니면 담임선생님과 
거의 동시에 등교하던 민석은 오늘따라
 교실에 빨리 들어섰다. 등교 하나 일찍 했을 뿐인데
 세상 모든 순간이 여유로운 느낌이다.
 
 
 
기다란 검은 우산을 가방걸이에 비스듬히 걸어놓고 
걸상에 앉은 민석에 눈에는 찬열과 종인이 들어찬다.
둘 다 아까부터 열심이 해드폰만 두들겨댄다.
 

 
 
"관심 좀 가져줄래. 나 학교 왔는데."
 
 
 
그래도 들려오는 답은 없다
그들의 양쪽 엄지손가락만이 분주히 화면 위에서 
움직일 뿐이다. 결국 민석이 스스로 고개를
 쭉 빼고 화면을 본다.
 
 
 
"피아노 타일? 이게 언제적 건데 지금 하고 앉아있어."
 
 
 
민석은 시대에 뒤쳐지는 아이들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상단에서 내려오는 검은색 타일을 음악에 맞춰서
 누르는 게임인데 그는 약 2년 전 이미 깰 수 있는
 레벨은 죄다 깬 사람이다.
 
 
 
 때 엄지손가락을 하도 많이 놀려서 
염증 바로 직전까지 오고서야 끊었다지.
 
 
 
 
"……."
 
 
 
민석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 없는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본다. 찬열의 핸드폰에서는 캐논 변주곡이
종인의 핸드폰에서는 쇼팽의 에튀드가 흘러나온다.
 
 
 
민석이 양쪽 검지 두개를 곧게 펼친다. 손을 뻗는다.
 
 
"!"
 
 
종인과 찬열이 동시에 소리 지른다.
냅다 도망치는 민석의 등을 향해 종인이 슬리퍼를
 벗어 던졌다. 최고 기록을 세우는 중이었는데 
민석이 방해하는 바람에 망했단다.
 
 
 
머리를 노렸으나 빗나가버린 슬리퍼가 
교실 사물함에 부딪혔다.
 
 
 
"시발 내 다이아를 감히 김민석 주제에."
 
 
 
부활시키는 데 다이아몬드를 두 개나 쓴 찬열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민석에게 던지려다가 관둔다
얼마 전에 바꾼 거라 할부가 한참이나 남았다.
 
 
 
손에 쥘 것을 찾는 찬열의 시야에 종인의 책상에 
널브러진 필통이 보인다. 아무 펜이나 꺼내들어 
다트 하듯 던진다. 0.25의 날카로운 촉을 가진 
펜이 그대로 날아가
 
 
"!"
 
 
민석의 뒷목에 꽂혔다. 교실 밖으로 도망치려던 
민석의 몸이 요란스레 뒷문에 부딪히자 찬열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크게 뜬다.
 
 
 
19년 만에 재능을 찾은 건가. 무림의 고수?
 
 
 
 
 
 
 
 
 
 
 
his.
 
 
"미안. 괜찮냐."
 
 
드르륵-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민석에게 
찬열이 물었다. 미안하다고는 하지만 표정을 보니 
신빙성이 떨어진다. 언행불일치의 표본이라고
 민석은 생각한다.
그가 찬열에게 눈을 부라렸다.
 
 
 
"괜찮겠냐. 괜찮겠냐고! 펜촉이 혈에 꽂혔다. 혈에!"
 
 
 
민석이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불을 뿜어낸다
소리 지르느라 욱씬거리는 뒷목에 붙여진 
거즈를 손으로 꾹 누른다.
 
 
 
"혈은 지랄. 양호 선생님은 그런 말씀 하신 적도 
없는데 왜 소설을 써."
 
 
 
민석의 뒤로 들어오는 종인이 말했다.
 
 
 
"넌 차라리 소설이라도 쓰지 그랬냐. 게임하고 토할 거
 같아서 양호실 다녀온 게 사실이라는 게 제일 웃겨."
 
 
 
민석이 눈을 반만 뜬 채로 이죽인다
찬열이 한심하다는 듯 종인을 바라본다.
 

 
"너네가 그 고통을 알아? 원인은 있는데 방법이 
없어서 약도 쓸 수 없는 그 사면초가를 아냐고."
 
 
사면초가는 지랄. 찬열이 중얼거렸다. 장장 이틀간 
쉬지 않고 게임을 하던 종인은 민석이 방해한 탓에 
게임을 그만둠과 동시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빠르게 내려오는 화면을 계속 보니 
사시도 좀 생긴 것 같고
멀미하다 토할 것 같고. 그래서 뒷목에 약을 바르는 
민석의 옆 침대에는 종인이 누워 있었다.
 
 
"아무튼 박찬열 오늘 네 우산 내가 쓰고 간다."
 
 
 
찬열이 한숨을 내쉬더니 책상에 철푸덕 
엎어지고는 얼굴을 마구 문댄다.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내 엉덩이가 
저지른 일을 왜 내가 수습해야 하지."
 
 
 
한 명은 뒷목에 펜이 꽂히고 한 명은 게임하다가
 현기증 난다며 책상을 부여잡고. 제 친구들이 
밀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건 말건 찬열에게는 
그냥 개그콘서트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늘도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웃던 그는 
너무 웃긴 나머지 주저앉다가
 
 
 
'미안.'
 
 
 
엉덩이로 민석의 우산을 분질러 버렸다.
어제는 우산을 안 챙겨오고, 오늘은 챙겨왔더니 
수고가 무색하게 망가져버리고 나는 우산과는
 인연이 영 아닌가.
 
 
 
''자로 구부러진 우산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석이 생각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엉덩이 섭섭하게
너도 네 엉덩이야."
 
 

"미친 거야?"
 
 
 
너 따위가 감히 나를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 찬열이 
종인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미안. 잘못 말했어. 네 엉덩이도 너야 라고 
말하려고 한건데."
 
 
 
넌 정말 또라이야. 찬열이 종인에게 말했다.
 
 
 
 
 
 
 
 
 
his.
 
 
"좀 놓는 게 어때? 나 바쁜 사람이야."
 
 
 
민석이 우산 끝을 잡고 놔주지 않는 찬열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낸다. 찬열이 손가락에 힘을 준다.
 
 
 
"네가 제일 한가해 보이는데 왜 바빠."

"학생회장이라는 게 원래 바쁜 직책이야."
 
 
 
하긴 한낱 개미와도 같은 박찬열 주제에 
뭘 알겠냐며 민석이 혀를 찼다.
 
 

"바지 회장이면서."
 
 
 
민석은 찬열의 손가락을 떼어내던 
손놀림을 더욱 빨리 했다.
찬열은 이제 집게손가락으로만 간신히 버텨낸다.
 
 
 
"나 집에 데려다 주고 가."
 
 
 
꺼져. 손가락을 모두 떼어낸 민석이 우산을 거꾸로 
들어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찬열이 그런 민석을
 바라보다가 입을 삐죽 내민다.
 
 
 
"집에 빨리 가봤자 VIP의 권위나 누릴 거면서."

"잘 아네. 요즘 가장 보람찬 일과 중 하나지."
 
 
 
민석이 입꼬리를 양옆으로 시원하게 
말아올리며 대답했다.
 
 
 
누가 저런 불순분자를 학생회장으로 뽑은 거야.
듣자 하니 압도적인 득표 수였으나 단언컨대
 자신과 종인은 절대 민석을 뽑지 않았다.
 
 
 
​…찮아. 너 써. 나는 어차피 
손잡이 잡아야 돼서 우산 못 써.
 
 
 
웅성거리는 아이들 틈으로 귀에 꽂히듯 들리는
 목소리에 찬열과 민석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반장이네. 찬열이 말했다. . 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장의 앞에 있는 남자 아이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오른쪽 다리에 깁스를 두른 그는 얼마 전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준비 운동도 없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발꿈치가 
으스러지듯 아파와 내원했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힘줄이 위아래로 오그라들어 다시는 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다.
 
그런데
 
 
 
"반장이 루피를 좋아했구나."
 
 
 
그런가봐. 민석이 대답했다.
 
 
 
반 아이들은 남자 아이를 루피라고 부른다
체력장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괴물같은 유연성을 
보여준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고무 인간에 버금가는 루피가 준비 운동을 안해서 
다치다니. 그야말로 별명 값 못한다 싶다.
 
 
 
 
루피가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약 6개월 간 반장이 
자진해서 등하교를 같이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장르가 청소년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로맨스물 
이었을 줄이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반장과 루피가 
계속 실랑이한다. 민석은 자신의 -찬열의 것이지만
 현재는 자신이 들고 있는- 우산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봐도 나는 우산이랑은 인연이 아니구나
앞으로 걸어가며 무심코 시선을 창 너머로 돌렸다.
 
 
 
"."
 
 
 
저도 모르게 벌어졌던 입을 다문다. 잠시인데도 
입안이 말랐는지 목이 탄다. 기침이 나올 것 같다.
마른 침이 넘어가 목울대가 움직인다. 민석은 우산을 
든 손에 힘을 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거 쓰고 가."
 
 
 
곱게 접힌 우산의 손잡이 부분을 반장에게 내밀었다.
, 휠체어를 미느라 우산이 있어도 못 쓴다고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가 반장의 겨드랑이 사이로 
우산을 끼워 준다가방을 대충 둘러 매고 앞문으로
 서둘러 빠져 나간다.
 
 
 
어느덧 반장의 손에 쥐어진 우산을 멍하니 
응시하던 찬열이 민석의 ''자 우산을 집어든다.
 
 
 
 
 
 
 
 
 
 
 
 
 
 
his.
 
계단을 뛰어 내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두리번거렸다.
이윽고 원하던 대상을 발견한 민석이 
시선을 고정하고 다가간다.
 
 
 
무얼 하는지 끙끙대는 미어캣의 뒤에 서서 
어깨 너머를 바라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민석이 미어캣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댄다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고 버튼을 누른다.
 
 
 
"여자애가 펴기에는 좀 뻑뻑한데. 손 다치면
 어쩌려고 계속 이 우산을 들고 다녀."
 
 
 
누가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란 건지 아니면 
그 사람이 민석이라 그런 건지 크게 뜨여진 눈이
 원래 크기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오늘도 두 손을 맞잡고 동공을 이리저리 
돌려댄다. 정신 사나워라.
 
 
"오늘은 우산 같이 써도 될까?"
 
민석이 넌지시 물었다. 미어캣이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설마 한 번 거절했다고 오늘은 안 된다 이런 건 아니지?
내가 오늘은 뛰어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가 쉴 틈 없이 조잘거린다.
 
 
 
"같이 가요."
 
 
 
미어캣이 민석이 들고 있는 우산 아래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는 동네 이름을 말하더니 
민석에게도 묻는다.
 
 
 
"는요?"
 
 
 
말의 앞머리는 쑴풍 잘라먹은 채로.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우산 한 개를 같이 쓰는 
사이에 호칭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녀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아 민석이
 짧게 웃었다.
 
 
 
"오빠는 그 옆 동네. 나름 이웃 주민이었네 우리."
 
 
 
그래서 선수를 쳐 버렸다. 3인칭으로 오빠를 칭하는 
날이 오다니. 종인이나 찬열이 들었다면 느끼한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냐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을 텐데.
 
 
 
직접 말하는 자신도 오글거려 견딜 수가 없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찌 됐든 정상적인
 호칭 정리는 된 것 같아 그걸로 되었다.
 
 
 
 
 
 
 
 
 
 
 
his.
 
미어캣은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말수가 적은 편이
 아니었다. 친화력은 좋지 않아도 할 땐 하는
 그런 스타일인 것 같았다. 물론 칭찬이다.
 
 
 
너무 시끄러워 인상을 찌푸리게 하지도 않고 대답이 
없어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냥 적당하고 평범하다.
 
 
 
독특하고 눈에 띄는 건. 머리에 꽂은 비녀 정.
할머니도 아니고 파릇파릇한 나이의 여고생이 비녀라니
가끔 공부에 매진하는 아이들이 머리끈으로 
질끈 동여매고 다니는 것은 많이 보았어도 
비녀는 너무 생소한 아이템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에도 머리에 꽂힌 일자 비녀는 그렇게 
눈에 띄었더랬다. 끝에는 짙은 녹색의 구슬 장신구가
 달랑거려 비 오는 날에 퍽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었다.
 
 
 
비가 와서 습기가 가득 찬 날의 녹색은 파릇한 이끼와 
녹음을 생각나게 했다. 비녀를 꽂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네. 막 애늙은이 같지도 않고 오히려 
유니크하고 성숙해 보이는 게 참 괜찮다.
 
 
 
"왜 그렇게 보세요?"
 
 
 
힐끔대며 하나하나 뜯어보는 걸 들켰다.
그녀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묻는다. 자기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은 건가 의심하며 얼굴을 문지른다.
 
 
 
"그런 거 아냐. 그렇게 문지르다가 얼굴 상한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얼굴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미어캣이 눈알을 도르륵 굴려대며 손끝을 매만진다.
 
 
 
얘는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두거나 아래로 
내리면 그나마 사람같을 텐데 꼭 제 명치 앞에 
두니 더 미어캣 같은 거다. 또 미어캣 됐다. 
민석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정면을 본다.
 
 
 
"."
 
 
 
그가 정면에서 달려오는 차와 
제 옆의 미어캣을 번갈아본다
좁은 이 골목길은 인도가 없어 차와 사람이
 다니는 길의 경계가 모호하다.
 
 
 
물론 애초에 민석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며 
그녀는 길 안쪽에, 자신는 차도 쪽으로 걷고 있었으며 
시속 30km도 안 되는 속도의 차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민석은 여전히 미어캣과 차를 번갈아 바라본다.
 
 
 
짧은 찰나에 오만 생각이 오간다. 그가 그녀의
 교복으로 시선을 내린다. 흰색 블라우. 아 씨.
 
 
 
"엄마야!"
"미안. 조금만 참아. 네 교복에 얼룩질까봐 그래."
 
 
 
민석은 더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붙잡아 
벽에 몰아붙였다. 그의 옆으로 차가 아슬아슬하게
 비껴 지나가며 물 웅덩이를 바퀴로 훑는다.
 
 
 
검게 때 탄 구정물이 촤악- 튀어 민석의 바지
 끝자락에도 방울방울 매달렸다.
 
 
 
"……."
 
 
 
민석이 그녀에게서 몸을 떼어낸다
완전히는 아니고 반만.
딱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리고는 천천히 머릿속에 상황을 입력시킨다.
 
 
 
그러니까 나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피하려다가 미어캣의 옷이 젖을까봐 내 몸으로 
막아주었고, 벽쪽으로 그녀의 몸을 몰았으나 
빗물에 젖은 벽에 옷이 닿아 등에 얼룩이 질까 
그녀의 몸과 벽 사이에 내 손을 끼워 넣었다.
 
 
 
 
그러니까 지금, 남들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을만한
 모양새다 이거에요. 누가 보면 백주대낮에 교복입고
 로맨스 드라마 찍는 줄 알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목은 박력 있는 학생회장의 벽밀 포옹.
 
 
 
 
민석이 그녀를 바라본다.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눈가에 주름이 질 정도로 여전히 세게 감고 있는 눈
벌렁거리는 콧구멍에 꾹 다문 입.
아 진짜 뭐야.
 
 
 
"너무 웃기잖아."
 
 
 
웃기다. 요 근래 본 것 중에 제일 웃긴 것도 같다.
 
 
 
푸하학-. 주체 못하고 터져버린 그의 웃음보에 
녀가 한 쪽 눈을 슬그머니 뜬다. 숨 넘어갈 듯
 웃는 민석이 보인다.
 
 
 
얼굴은 또 왜 이렇게 가까이 하고 웃는 건지
부끄러운 마음에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지만 
민석을 더 웃게 만들었을 뿐이다.
 
 
 
 
 
 
 
 
 
 
 
 
his.
 
커튼을 쳐 놓아도 섬유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강한 햇빛에 민석이 마지못해 눈을 뜬다.
 
 
 
뻔뻔함을 장착하고 모르는 체 다시 자고 싶지만 
평일에는 학교를 가야하는 학생의 신분이므로 침대 
끝까지 몸을 굴린다. 떨어지기 직전에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켜 슬리퍼에 발을 끼운다.
 
 
 
거실과 연결된 부엌 가장자리에 놓인 식탁에는 한 때 
노릇노릇 했을 토스트가 접시에 담겨있다
엄마가 만들고 출근했을 테니 지금은
 이미 식어 눅눅하다.
 
 
 
한껏 맛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교복을 입는다.
 
 
 
"짜증나."
 
 
 
민석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제 뉴스가 끝날 무렵에 
 예쁜 기상 캐스터 누나는 내일이면 장마가 끝나고
 폭염에 가까운 햇볕이 내리쬘 거라고 말했다.
 
 
 
오늘은 어제 그녀가 말했던 내일이고 기상 예보는
 틀리지 않았다. 짜증나게도 맑다. 가을도 아닌데 
하늘이 높고 푸르기 그지없다. 구름 한 점 없다.
 
 
 
평소 민석은 오차율 30퍼센트가 넘어가는 기상청에 
욕을 바가지로 퍼붓곤 했다. 근데 오늘은
 잘 맞췄는데도 짜증이 인다.
 
 
 
아니었으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속으로 되뇌인다.
 
 
 
무서운 거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는 미어캣을 볼 수 
없는 마법에라도 걸린 건 아닐까 불안한 거다
만나도 우산을 같이 쓸 수 있는 핑계가 없으니 
기운이 빠진다.
 
 
 
어깨에 20kg 쌀가마니를 얹어 놓은 것 마냥 무겁다.
 
 
 
"역시. 후레후레보즈*라도 만들었어야 했어."
 
 
 
민석은 현관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장우산을
 힐끔 보다가 집을 나선다.
 
 
 
 
 
 
 
 
 
 
 
 
 
his.
 
학생회장의 감투를 쓰면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이 그런 경우다
체육 전담 선생님으로부터 체육관 청소를 부탁 받았다.
굳이 저를 콕 집어 이야기했단다.
 
 
 
짬이 없어 힘도 없는 민석의 담임선생님이 미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열쇠를 건네면서 그렇게 전해주었다
이런 걸 왜 바쁜 고3에게 시키는 거냐며 이해가
 안 간다고도 덧붙였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거 빨리 하고 끝내자는 생각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열쇠를 받아 들고 
체육관으로 가는 길이었다.
 
 

 
"……."
 
 
딱 일주일 만에 미어캣을 다시 보았다.
 
 
 
 
사실 장마가 끝나고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장마가 끝난 바로 다음 날, 기상청이 안 어울리게도 
기가 막히게 맑은 날씨를 맞췄던 그 날에도 민석은
 미어캣을 마주쳤었다.
 
 
 
하굣길, 아직 학교를 벗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 사이로 신발장 앞에 선 민석과 미어캣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지나쳤다. 흔한 눈인사 하나 없이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각자의 집으로 향했었다.
 
 
 
 
민석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미어캣은 두 다리를 
굽히고 쪼그려 앉아 화단에 핀 코스모스 끝을
 손톱으로 툭 건드린다.
 
 
 
아직은 여름임이 분명한데 시기를 잘못 알고 일찍 
피어난 코스모스 한 송이가 있었나보다. 신기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하게 예뻐서인지 눈을 떼지 못한다.
 
 
 
민석이 입술을 꾹 다문다.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혀끝에 그녀의 이름을 머금는다.
 
 
 
 
부르기도 전에 그녀가 그를 본다. 순간적으로 민석은 
제가 혹시 육성으로 이름을 말해버린 건가 
헷갈리지만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인사를 건넨다
인기척을 느낀 거겠지.
 
 
 
"안녕."
 
 
 
안녕하세요. 오빠. 그녀가 말했다. 거리낌 없이 
오빠라고 부른다. 그 때 미리 선수치길 잘 했다고 
민석은 중얼거린다.
 
 
 
그녀가 민석에게로 걸어온다. 충분히 가까워 졌는데도
 멈추지 않는다. 장미를 품은 샴푸 향기가 
끝에 맴돈다. 그때처럼 별말없이 지나친다.
 
 
 
 
민석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눈부시게 뜨겁다
좀 쉬어도 되는데 태양이 참 열일하네
민석이 실없이 생각하다가 입을 연다.
 
 
 
"왜 비 오는 날에만 우산을 써야 해?"
 
 
 
? 주둥아리야. 왜 이러니 너. 왜 주인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 거야. 난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야.
 
 
 
 
멈춰선 미어캣이 의아하게 돌아보는 게 느껴진다
말이 좋아 의아하게이지 저 눈동자에서 묻어 
나오는 건 분명 개씹황당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니?이젠 환청까지 들린다
미어캣의 목소리다.
그러니까 내 말은
 
 
 
"햇빛에 얼마나 많은 자외선이 들어있고
 그게 얼마나 몸에 해로운."
 
 
 
민석은 그냥 입을 다문다. 주인에게 반항하는 입 따위 
그냥 열지도 않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속으로 욕을 읊조린다.
 
 
 
"그러니까 비가 안 오는 날에도 우산을 써야 한다는 
건가요? 자외선 때문에?"
 
 
 
미어캣이 물었다. ?,. 더듬거리며 그가 대답했다.
 
 
 
 
최악이다 주둥아리야. 거기서 대답은 또 왜 하니?
앞으로 이틀은 굶어야겠다고 다짐한다
나오는 말이 최악이니 들어가는 음식이 
좋아봤자 낭비일 뿐이다.
 
 
 
 
미어캣이 안쓰럽게 바라본다.
 
 
 
"오빠, 생일이 언제에요? 양산 선물해 드릴게요."
 
 
 
생각해보니 오늘 저녁까지만 굶어도 되겠다
신 같은 헛소리를 내뱉었지만 그로 인해 생일을 
묻다니. 생일이라 함은 응당 친밀한 사이에서 
꼭 알아야 할 첫걸음과도 같은 것이 아니던가.
 
 
 
그 질문이 마치 더 가까워질 여지를 주는 것만 같아
 가라앉았던 기분이 붕붕 뜨는 것이 느껴졌다
태어나 양산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안쓰러운 눈빛은 민석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민석이 그녀를 바라본다. 한숨을 내쉰다
모르겠다. 이제는 아무렴 어떤가 싶다.
 
 
 
"원래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아
눅눅하고 불쾌해."
 
 
 
반곱슬 때문에 머리도 부스스해지고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야
민석이 덧붙였다가 후회한다.
 
 
 
이 말은 하지 말걸. 나 좀 없어 보이는 듯.
그래도 말을 이어간다. 아무렴 어때.
 
 
 
"근데 장마가 끝났다니까 짜증이 나.
우산이 아니면 너와 만나도 말도 걸 수 
없다는 게 서운해."
 
 
 
미어캣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입이 벌어지고 
구부정하던 자세가 목과 허리를 쭉 피면서 꼿꼿해진다
두 손을 맞잡고 명치 앞에 둔다.
 
 
 
 
민석이 볕이 내리쬐어 눈이 부신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늘 이렇게나 날이 좋지만
 
 
 
"같이 집에 갈까."
 
 
 
우산을 쓸 일이 없어도 가까이서 나란히 걸을까.
 
 
 
 
그녀가 민석을 빤히 바라본다. 여전히 몸은 목석마냥 
뻣하고 놀란 듯 눈은 동그랗지만 민석은 안다.
 
 
 
싫어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반응이 아닌 거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못나 보인다지만 확신한다
자신은 오늘 분명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할 거다.
 
 
 
 
 
 
 
 
 
 
 
 
 
his.
 
하굣길이었다. 그 날 골목길에서 권장속도를 초과하며 
달리던 차에게 구정물 습격을 당했던 골목길을 
걷는 중이었다.
 
 
 
"이제 나는 비가와도 우산 안 챙길 거야."
 
 
 
물웅덩이를 피하려 다리를 앞뒤로 쭉 찢는 미어캣에게
 민석이 말했다. 그가 웅덩이를 건너뛸 생각인 
미어캣을 잡아당긴다.
 
 
 
물이 한강인데 네 다리로는 턱도 없지. 민석의 말에 
미어캣이 밉지 않게 그를 흘긴다
그러다가도 그에게 묻는다.
 
 
"왜요?"

"우산은 앞으로 네가 챙겨."
 
 
 
우리 집에 있는 우산은 다 커서 안 돼. 불퉁해졌던 
미어캣의 표정이 민석이 뒤이어 하는 말에 의아해진다.
 
 
 
"크면 좋은 거 아니에요? 비도 덜 맞고
아 혹시 무거워서?"
 
 
 
아무래도 크기가 큰 어른용 우산은 무거울 테니.
민석이 그녀의 머리에 큰 손을 턱 하니 올린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그녀의 머리를 감싸듯 꼭 쥔다.
 
 
 
"너한테 들게 할 생각 없으니까 무거운 건
 별로 상관없는데."
 
 
 
그럼 대체 왜 그러냐는 듯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가 그녀의 머리에 얹은 손에 힘을 주고 누른다
좌우로 움직인다. 미어캣의 몸도 좌우로 흔들린다.
 
 

"뭘 모르네. 원래 연인은 작은 우산 쓰는 거야."
 
 
 
미어캣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길을 
보내지만 민석은 설명해 줄 의향이 없다.
 
 
 

그러다가 빗물 피하려고 찰싹 붙으면 더 좋고
민석이 중얼거리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다
앞서 걷는 민석을 총총 쫓아가기 바쁘다.
 
 
 
 
 
 
"우산은 꼭 하나만 챙겨와."
 
 
 
.
.
.

※만든이 : 로웨나님
 
<덧>
 
본문에 나오는 *후레후레보즈란


 
이거랍니다! 잠들기 전에 요 아이를 창밖에 걸어두면
 다음 날 비가 온다고 해요. 우리에게 익숙한
 

 
이 테루테루보즈를 뒤집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테루테루보즈는 비가 안 오게 해주는 아이랍니다
 
 
 
 
 
 
*
안녕하세요! 로웨나입니다. 오늘도 단편으로 찾아왔어요.
추적추적이 아니라 보슬보슬 비가 내리는 날은 
제가 참 좋아하는 날씨에요.
빗물이 톡톡 부딪히는 우산 아래에서 피어나는
 예쁜 사랑이 꼭 첫사랑 같아서 
제목을 이렇게 붙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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