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결혼 (by. 로웨나)



his.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을 열었더니 
가관도 아니다. 분명 문을 열기 전까지는 일반 사람 
사는 집과 다름없었으니 21세기 기술 발전에 걸맞게 
집 안에만 폭탄을 터뜨린 줄 알았다.
 
 
 

, 좀 일어나지? 지금이 몇 시인 줄은 아냐?”
바닥에 지뢰마냥 흩뿌려진 과자 부스러기와 
빈 봉지들을 발로 대충 툭툭 차 만들어낸 길을 따라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른 발을 들어 올려 밀어내듯 툭툭-.
 
일어나란 말이야 제일 큰 쓰레기.
 
 
 
 
바닥에서 비척비척 일어난 그녀가 시계를 본다
하지만 소용 없다. 핸드폰이 있는 그녀는 굳이 시계를
 볼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밥을 제 때 주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집 불쌍한 시계는 이미 죽었다.
 
 
 
뭐야, 아홉 시잖아. 왜 꼭두새벽부터 깨우고 지랄이야.”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초점이 잘 안 맞춰지는지 
눈에 힘을 주고 뚫어져라 시계를 바라보던 그녀가
 내 발가락을 피해 소파로 가 다시 드러누웠다. 
 
 
 
이제보니 눈이 성치 않아 밥을 주지 못 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홉 시란다이리저리 산발한
 머리카락이 소파에 늘어지는 게 꼭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가 본 바야바 같다고 생각했다.
 

아홉 시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럼 내가 깨우겠냐.
지금 두 시다, 두 시.”
 
 
그런 내 말에도 미동 없던 그녀가 몇 초 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눈을 마주했다.
 
  
두 시? 오후?
 
  
대답할 필요도 없이 한심하다는 눈빛만 보내자
 다시 눈을 감는 그녀가 보인다.
 

 
"미쳤네."
 
 

네가 미쳤다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정적으로 내가 아는 데 굳이 말하고는
 다시 잠에 빠진다. 졸린 건 졸린 거란다.
 
 
 
그래, 20년을 겪었는데 주말에 깨운다고 일어나길
기대했다니 너무 많은 걸 바랐다 생각하고 주방으로 가
 인덕션을 켰다. 오늘 아침은 달걀 실파국이 괜찮겠다.
 
 
 
 
 
 
 
 
 
 
 
 
her.
찬열이 차려 준 아침-을 빙자한 
점저-을 먹고 아직 식기를 치우기 전이다.
 

먹었으면 좀 치우지?”
 
​​귀찮아.”
 
찬열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깔끔하다
동물은 보고만 있어도 좋아하면서 집안에 털 날린다고 
키우지는 않는 사람이다. 고양이는 사랑하지만
 알러지가 있어 못 키우는 나대신 키워달라고 말했다가
 동물의 털에 존재하는 수 억 바이러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봐야 했다.
 

차려준 밥 먹었으면 치우기는 네가 좀 해라.”
 
차려준 김에 열이가 오늘 하루 풀 코스로
 서비스하는 걸로 하자.”
 
​​늘어지는 주말 오후에 두 팔 걷어붙이고 밥 먹여준 건 
고맙게 생각한다. 혼자 두면 밥은커녕 배도 안 고파 
끼니를 때우는 것도 잊어버리는 나 때문에 찬열의 
주말 일과는 점심 준비로 시작한다. 아침은 내가
 꿈나라에서 허우적댈 시간이므로 먹지 않는다.
 
 

가위바위보 해 그럼. 더 이상은 
나도 물러설 수 없어.”
 
그는 항상 별것도 아닌 일에 쓸 데 없이 비장하다.
하지만 이 더운 여름날에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
 하는 것은 별일 아닌 일이 아니니 나도 비장하게
 참여하기로 한다.
 
삼세판이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 ! 잠깐만.”
 
현재 스코어 박찬열 1 내가 0. 첫 판은 무승부였으니
 찬열이 한 번만 더 이긴다면 고무장갑은 내 거다.
근데 가만 보니 이 미친놈이
 
 
사기 치기 있냐.”
 
내가 뭘.”
 
너 지금 계속 늦게 내고 있잖아.”
 
이 미친놈이 0.2초씩 늦게 낸다. 따지기도 애매한 
찰나의 순간에 승부는 결정 난다.
 
 

너는 예전에 TV도 안 봤냐. 그 프로에서 0.2초는 
가위바위보에서 중요하다고 했어.”
 
 
넌 대체 무슨 프로그램을 봤길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 룰에 어긋나지 않는 반칙은 반칙이 아니라
 전략이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다음 판에도 지면 
꼼짝없이 싱크대 행이니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하다.
 
 
 
히잉.”
 

뭐한 거냐.”
 
애교?”
 
찬열이 눈을 깊게 감았다가 천천히 뜨고 나를 본다.
 

양심이 있으면 가서 고무장갑 끼자.”
 
그래. 군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나름 획기적이었던 것 
같은데 실패다.
거실에 남은 찬열이 애교는 지랄. 말이냐
결국에 열을 못 이기고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이번에는 내공이 부족한 탓이니 다음번에는 반드시 
찬열을 굴복시킬 치명적인 말 울음소리를 
개발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his.
누군가 그녀를 보고 넌 참 겁이 없구나 하면 나는
 백 퍼센트 동의한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럴 것이다. 밤늦은 시간에도 이어폰을 
꽂고 돌아다니는가 하면 저보다 몇 배는 덩치가 
큰 남자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다. 덕분에 저러다
 어디 가서 맞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은 
불안한 마음을 나는 20년 째 안고 사는 중이다.
 
 
 
, 공포 영화. 딱히 즐기지 않는 그녀지만 그건
 귀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깜짝 놀라는 
그 느낌이 싫어 잘 보지 않는단다.
 
 

넌 대체 이게 뭐가 무섭다는 거냐.”
 
무섭잖아. 손가락 잘리면 어떡해.”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게 있다면 
그건 선풍기다. 이 또한 20년 째 보아온 모습이라 
지금은 딱히 드는 생각도 없지만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수명이 줄어들 그녀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다 아프다.
 
 
쓸데없긴 왜 쓸데없어? 넌 뉴스도 안 보냐
선풍기 만지다가 손가락 잘려나간 어린애들이 
수두룩 빽빽인데.”
 

그게 쓸데없다는 이야기의 핵심이야
넌 어린이가 아니잖아.”
 
어린 시절로 돌아갈 일도 없고. 서른이 넘어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어린이 운운하는 그녀는
 참 양심이 없다
게다가 그녀가 무서워하는 것은 힘차게 돌아가는
 선풍기의 날 뿐만이 아니다.
 
선풍기가 무섭게 생겼어
눈코입 다 달려있는 것 같지 않아?”
 
눈코입이 달려 있다고 무섭게 생겼다면 하늘 아래 식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조성해야 한다. 이 세상에 무서운 존재만 남아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고 종족 번식을 해나가는 거다.
 
 
결국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커버가 씌워지는 
선풍기를 아련하게 쳐다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가게.”
 
커버를 다 씌운 그녀가 눈만 돌려 나를 바라본다
고개를 치켜드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다.
 
 
 

일어나. 우리 집 가게.”
 
 
우리 집에 가서 에어컨을 틀 거다. 이 날씨에 에어컨도
 없으면서 선풍기도 못 틀게 하는 이 집은 테러를
 위한 신종 핵무기다.
 
 
귀찮아. 인생은 원래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고생길이 시작이라며 
나도 그냥 안전하게 제 집에 숨으라고 말한다.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네 인생은 집에 있어도 개고생이야.”

양심 없는 것. 제 집이 무슨 온실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그리고 고작 스무 발자국도 안 되는 거 좀 걸어라
나중에 더 늙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내 집과 그녀의 집은 기껏해야 스무 발자국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옆집 그냥 뒀다 국 끓여 
먹으려고 그러는 지도 모르고.
 
 
 
     그녀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앞으로
 자신이 할 말이 생각만 해도 웃긴 사람인 마냥.
 
 
내 남편이 날 업고 다닐 거야.”
 
근데 또 막상 들은 사람 입장에서는 그다지
 웃긴 말도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다. 꿈도 야무지지
그런 남편감이 있다면 이미 다른 여자가 채간 
후일 거다. 성격 좋은 일등 신랑감을 그냥 방치해
 둘 정도로 세상 미혼 여성들이 게으르지는 않다.
 
 
난 누군지도 모르는 네 남편한테 벌써부터 미안해.”
 
뭐라는 거야. 네가 왜.”
 
반쯤 신었던 신발에서 다시 발을 빼고 그녀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챘다. 그녀가 의아함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대로 어깨 위로 올려 
들쳐 업었다. 폭염주의보가 빗발치는 오늘 같은 날씨에 
대체 뭐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했다
열에 데워진 두 몸이 만나니 마치 커버가 씌워진 
선풍기가 된 기분이다.
 
왜긴 왜야. 너를 이렇게 만든 데에 
내가 일조한 거 같아서.”
 
그녀가 까르르 웃더니 내 목에 팔을 휘감는다
진짜 존나 더우니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일조했다 뿐이겠냐. 너는 그냥 지분 90프로야.”
 

지분으로만 따지자면 나는 대주주 중에서도 대빵이지.”
 
 
실없는 농담에 동시에 웃음이 팡 터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내 집으로 향한다
그녀와 나의 집은 고작 스무 발걸음도 안되는 
거리이지만 같은 건물은 아니다.
 
 
 
먼 듯 하면서도 가까워 지금이 딱 좋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생활은 지켜주면서도 필요하다면 당장이라도
 서로의 집으로 가길 망설이지 않는 딱 그 정도의 
리가 나쁘지 않다.
 
 

나중에 아이는 나한테 맡겨라
네가 키우다가 나처럼 되면 어떡해.”
 

그녀가 말했다. 뭔 개소리야.
 


뭔 개소리야. 네가 키우면 뭐가 달라져
더 심해지면 심해졌겠지.”
 
아니지. 나한테 맡기면 내 남편이 키울 테니까.”
 
깔깔-. 목 뒤에서 울리는 마녀 같은 웃음소리에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미래 남편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그 분이 너에게 장가와 그렇게 고생하려고 여태 열심히
 살아온 건 아니었을 텐데.
 
 
 
 
 
 
 
his.
평소에도 결혼, 남편 등을 입에 달고 사는 그녀는 사실
 요즘에 와 갑자기 가정에 관심이 생긴 건 아니다
갓 제대를 하고 복학한 내가 그녀를 과방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쭈욱. 그녀는 결혼 이야기를
 고집해 왔다.
 
그러니까, 서른을 넘긴 혼기 꽉 찬 딸이 부모님께
 손주 안겨드리겠다고 노력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나는 결혼 빨리 하고 싶었어.”
 
싶었다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걸 보니 지금 당장 
결혼한다 해도 적은 나이는 아니라는 걸 아는 거다
어려서부터 다투는 모습을 아이 앞에 보이지 않은 
부모는 딸에게 결혼에 대한 선망을 심어 주었다.

근데 웃긴 건, 단 한 번도 나는 결혼 안 하고
 아빠랑 살 거야. 라던가 아니면 나는 아빠 같
 사람이랑 결혼 해야지. 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대.”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도 그런 따뜻한
 이야기를 한 적 없다는 자신이 무척 신기하단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아이들은 한 번쯤은 했을 
법한 대사이니까. 그런 그녀는 결혼은 하고 싶다면서 
연애는 하기 싫은 웃긴 여자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애는 좀 귀찮잖아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신뢰를 잃지 않으려고 
꼬박꼬박 연락하고 보고하고. 그렇게 해서 마음 
다 줬는데 나중에 헤어지면 어떡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 과정을 어떻게
 견디느냐고 말한다. 사람만 다를 뿐
과정과 감정은 반복이라고.
 

 
상대가 다른데 감정이 어떻게 반복이야
너는 사랑할 때마다 지루할 것 같아?”
 
   
안 그래도 자주 다투는 그녀와 내가 더 거세게
 부딪힐 수밖에 없는 주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감정에 무감각한 그녀에 비해 
나는 모든 일에 소녀 감성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말다툼은 언제나
 
 
  
어린 새끼.”

 
 
어린 새끼로 종식된다. 그녀는 남자가 여자보다 
뇌 성장이 느려 적어도 체감 상 두 살은 어리다더니 
실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것도 스무 살 까지지. 내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는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찬열아, 너는 꼭 너보다 열 살 어린 여자 만나
두세 살 어려도 너의 정신연령에는 어릴까 말까야.”
 
 
  
저 미친. 저 상또라이. 그녀가 내 집 냉장고에서
 두유를 하나 꺼내고는 현관문을 닫고 나간다
속에서 끓어오르던 불이 그녀가 나가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는다. 나보고 어리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나도 안다. 요즘 그녀의 행동은
 
 
지는 유치원생 주제에.”
 
 
  
마치,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 두려운 한 아이가 
내가 너의 상황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하고 
자신하는 미취학 아동 같단 말이다.
 
 

 
 
 
 
 
her.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5년 전이었나
그렇게 가깝지는 않지만 나름 좋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 놈의 결혼식에 가던 길이었다.
그 친구는 나름의 활달한 성격에 모든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는데 찬열도 그 중 한 명이다.
 

 
저 새끼가.”
 
 
 
찬열이 욕을 씹어내듯 뱉었다. 앞서 가던 차와 우리가
 탄 차의 좁은 틈새로 은색 아우디 한 대가 끼어들었다
덕분에 급정거를 밟은 찬열이 반사적으로 내 앞에 
팔을 길게 뻗었다.
 
 
.”
 

아니 존나 저 새끼는 목숨이 여러 개인가 보지?
불공평하게 보통 사람들은 목숨이 하나씩인데
 저딴 식으로 끼어들면 어쩌자는 거야.”
 
 
노발대발 열을 내느라 내 목소리가 
귀에 닿지도 않은 모양이다.

찬열아.”
 
.”

집 나간 정신은 되돌아온 듯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앞 차를 향해 있다.
 
이제 손 좀 치워봐.
 
 
 
그제서야 나를 바라본 찬열의 시선이 천천히 
제 손으로 옮겨 간다. 내가 숨을 조금이라도 크게 
쉬면 가슴 언저리에 닿을 듯 말 듯 한 그 손으로
그렇다고 내가 숨을 안 쉴 순 없잖아. 애초에 사람이 
태어나 하는 모든 일이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짓인걸.
 
  
 
노렸어?”
굳어져 움직일 생각을 않는 찬열에게 내적 웃음을 
속으로 삼키고 말을 건넸다
뭔가 지금은 놀릴 타이밍이다.
 

 
그렇겠어? 네 가슴 만지면 내가 손해야.”
 
그가 팔을 접어 다시 핸들을 잡았다.
 

뭐야, 너 나 모르게 만져봤어? 안 만져보고서 
손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욕구불만이세요? 말 하는 게 
꼭 만져 줬으면 하는 거 같다?”
 
 
끊임없이 장난을 걸어 댔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측면으로 보이는 그의 붉어진 귓가가 신경 쓰일 것만
 같아서. 그렇게 되면 밀폐된 차 안에는 어색한 기운이 
감돌 테고 그건 나와 20년 지기 사이에 환영할 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그와 나 사이에 애매한 관계는 어울리지 않았고
 언제까지나 단단한 친구 사이이길 바랐다.
단단한 친구 사이는 이런 낯 뜨거운 대화 주제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무감각해야 했다.
 
 
 
 

 
 
 
 
 
her.
요 며칠 야근이 이어지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인지 정시
 퇴근을 해도 좋단다. 입사 동기 김종대는 학창 시절 
연애에나 유치하게 써먹던 밀당 기술을 김 팀장이 
회사에 적용하는 거라고 툴툴거렸다.
 
 
 
야근이라는 채찍을 내리 주다가 어느 날엔가 딱 한번 
칼퇴라는 달콤한 당근을 던져 주면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들어 이후에는 당근만 바라보고 채찍을 견뎌 
낸다는 것이다. 법적으로는 매일매일을 당근만
 먹는 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말이다.
 
 
뭐랄까 연애라기보다는 사육 같지만 김종대는
 학창 시절 연애를 그런 식으로 했나 보다
혹은 당한 입장일지도 모르고.
 
 
 
차키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이는데 깊숙이 들어간 건지 
나오라는 차키는 어디가고 핸드폰이 딸려 나왔다
이왕에 집은 거 홀드 버튼을 누르고 시간을 보는데
 저녁 먹기 딱 좋은 시간인 거다. 퇴근 시간 러시아워에
 발목을 잡힐 수 있으니 서두르며 제 2의 집으로 향했다.
 
 
 
 
 
 

 
 
her.
얼마 전부터 찬열이 먹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곱창을 
사들고 문을 열었다. 이 시간쯤이면 한창 저녁 준비를
 하느라 홀로 부엌에서 분주한 그의 집이
 너무나도 조용하다.
 
 
 
혹시나 그는 내 집으로, 나는 그의 집으로 가 길이 
엇갈렸나 생각했지만 분명 그의 신발은 
현관에서 얌전하다. 워낙에 큰 키인 찬열은 발도 
커서 저 정도의 신발 사이즈는 내가 아는 한국인 중 
그밖에 없기에 집에 있는 건 맞다.
 
 
박찬열!”
 
 
 
시끄러운 걸 싫어하는 그는 내가 도어락을 열 때의
 소리조차 시끄럽다며 최대한 삑삑 소리가 작게 나는 
기계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그의 집 문을 직접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나나 그의 가족-은 그가 거실에 
있지 않는 이상 들어와도 잘 모른다.
 
 
그러다 집에 도둑이 들면 속수무책이라고 내가
 여러 번 잔소리를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건 당연하다.
이번에도 못 들은 건가 싶어 그를 부르며
 방문을 같이 열었다.
 
 
 
뭐냐 이건.”
 
 

 
문을 여니 무언가를 손에 쥔 찬열이 나를 보고 있다
친절하게는 당연히 아니고 반갑게는커녕 나를 노려보면서.
손에 쥔 건 이쑤시개보다 조금 더 긴 나무 막대기다.
 
 
글로우 스케치?”
 

 

심신의 안정이 필요했어. 근데 너 때문에 다 망쳤어.”
 
 
 
드르륵-. 그가 나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더니 바퀴달린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난다. 딱딱한 결이 세로로
 나 있는 나무 바닥에 바퀴가 밀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가 막대 끝으로 검은 표피를 벗겨내고 있던 루브르 
박물관 도안은 미세한 선이 교차하는 고난이도 
도안이라 심혈의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내가 문을 벌컥 열어 젖혀 놀라는 바람에 도안
 정중앙으로 스크래치가 길게 나버렸단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게 정성을 다 한 것 치고
 크게 아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나와서 밥이나 먹어. 너 먹고 싶다던 곱창 사왔어.”
 
 


, 소주는?”
 
술 좀 그만 먹어라. 지난달에 췌장염으로 
고생해 놓고서도 술이 들어 가냐?”
 
 
 그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다간 일찍 죽어.”
 
 
 
그런 걸 신경 안 쓰고 살아서 일찍 죽는 거겠지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 게 아니므로 저건 
말이 아니라 소리다. 개소리. 멍멍.
 
 
 
 
 
 
 
 
 

his.
어느 날엔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다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그 때의 그녀는 내게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가 전부가 아닌 남자.
자기 커리어에 욕심이 있는 남자.’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래서 사랑에 눈이 멀지 않은
하고 싶고, 하고 있는 일에 연애가 장애물이 되지 않을
 그런 남자가 좋다고 했다.
 
 
잘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나만 사랑해주는 남자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법적으로 
인정받는 성인의 나이 스무 살을 넘긴 뭇 여자들도
 이렇게 대답하는데 보다 어린 그 날의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넌 참 독특해. 이상해.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성숙한 거지. 내가 성숙하니 내 남자도 성숙해야 해.’
 
 
 

그건 성숙이 아니라 애늙은이야
장하지 마, 포장의 달인.’
 
 

내 말에 그녀는 그것도 그렇다며 
웃어대다가도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지극히 정상이야. , 모든 여자들은 일 하는
 남자가 멋있어 보인다고 하잖아. 나도 그런 거지.’
 
 
 
생각을 해 봐. 너무 좋아하는 여자친구인 거 알아
데 그녀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거나 회사에 잘린다면 
그건 바람직한 연애일까. 저만 바라봐주길 원한다던 
여자친구도 그걸 바랐을까. 그녀가 말했다.
 
 

게다가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야.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끌리는 남자는 그래.’
 
 
 
그녀가 이렇게 말을 잘 했었나. 이리저리 궤변을 
늘어놓지만 말 잘하는 달변가에게 설득당하고 
있는 건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순간 그녀가
 멋있다 느꼈다는 건 지금에 와 생각해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her.
말은 그렇게 해도 술을 사 왔다는 걸 그는 나와 보낸
 시간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나 보다. 누가 봐도
곱창이 들은 검은 비닐봉지는 그냥 지나치더니 소주병이 
담긴 편의점 봉투로 직진한다. 차갑게 먹어야 
한다며 봉지 째 냉장고에 넣는다.
 
   

크으-.”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고 영락없이 아저씨 같은 추임새를 
내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가 곱창을 당면과 깻잎으로
 감싸 입에 넣는다. 그리고 또 술을 홀짝이고
내 빈 잔을 쪼르르 채운다.
그가 이번엔 곱창만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 !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해! 왜 쳐다만 보는 거야
사람 밥 먹는 데 신경 쓰이게.”
 
 

거짓말이다. 내가 보는 몇 분 동안 그는 앞에 
놓인 음식에만 열중했다.

 
 
너 보복 운전 같은 건 안 하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데. 맥락 없는 내 말에 씹던 걸 
멈추더니 가만히 바라본다. 그대로 꿀꺽 삼킨다.



갑자기 무슨 보복 운전. 너 오다가 보복 운전 당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밥 먹다 흥분을 하고 그래 얘가.
 
 
 
저번에 결혼식 날 말이야. 너 원래 그런 걸로 화내는 
애 아니잖아. 큰 일 안 났으니 됐다- 가 
네 마인드 아니야?”
 
 

그는 항상 그랬다. 큰 일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 됐다
이런 사소한 일로 열을 내기에 내 에너지는
 아깝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상으로 30년을 살아온 찬열은 나를 
제외하고는-나와 싸울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한 일에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직접적인 피해만 없다면
 그에게 사소함이란 보통 사람들의 기준보다 관대했다.
 
 
예외로 나는 그의 정신에 피해를 입히니 이건 
소송감이란다. 언제 한 번 경찰을 부를까 
숙고 중이라는 이야기도 했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들고 있던 젓가락을 달그락 내려놓은
 찬열이 대답했다.
 

 
“20년을 알았는데 왜 몰라.”
 
 

그게 아니라.”

 
?
 
 


그 날 내가 화가 났던 건 너 때문이야
내가 혼자 탔던 것도 아니고 네가 조수석에 
있는데 혹시나 잘못될까봐.”
 
 

그가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또다. 차 안에서처럼 
어색한 공기가 거실에 가득 차 주변을 메운다
하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거실은 오픈 된 공간이고
 그렇다면 이 공기가 어디론가는 빠져 나갈 구멍이 
분명 있을 텐데 여전히 낯선 공기는 포화된 상태임에도
 계속 밀려와 이제는 내 폐부 깊은 곳까지 잠식시킨다
피할 수 없다.
 


 
난 네가 옆에 있어서 화가 난건데 네가 없을 평소에 
화를 내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네가
 때 너는 없는데.”
 
  
뒤죽박죽 정리되지 않은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내가 아는 찬열은,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는 지금 할 말이 있고 담아두다간 속에서 섞여 
더 알 수 없게 될 테니 그냥 막 내뱉고 보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열과 나는,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건 또 그러네. 내가 볼 때의 너와 내가 없을 때의 
너는 다를 거라는 건 미처 생각을 못 했.”
 
 

나이만 많은 어린 아이인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에 
소질이 없다. 괜히 반쯤 비워진 소주병만 만지작거렸다
찬열이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제 잔을 내민다.
 
 


안 한다는 얘기야. 보복 운전 같은 거
화난다고 차에서 내리지도 않아.”

 
 
무서워. 싸우자고 내렸다가 창문 열면 용문신으로 
뒤덮인 형님이 나올 거 같아서. 어느 새 풀린 분위기는
 그도 나도 웃게 했다. 혼자서는 태연할 자신이 없었지만
 둘이 같이 하는 외면은 수월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요즘 세상 참 흉흉해-. 그래서 나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his.
요즘 세상 참 흉흉해-.”
 

그녀가 말했다. 어려서부터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아 습관으로 굳어진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속내를 
내게 다 들켜버린다. 안도하고 있는 거다
위험한 순간이 어물쩍 지나갔으니 다시는 그런 분위기에
 발도 들이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는 거다.
 
 
 

만나볼래, 우리.”
 
 
아쉽게도 나는 응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 바닥을 보이는
 곱창 접시에 아쉬움을 한껏 드러내던 그녀가 그대로 
굳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이 마치 며칠 전 완성한 글로우
 스케치 모아이 석상 도안 같아 웃음이 난다.
 
 
아니다. 결혼하자.”
 
 

그제야 그녀가 픽 웃는다.
 
 
  
박찬열 감 많이 떨어졌네. 요즘 아이디어 궁해
이런 장난이나 치고.”
 
 
그 아이의 상식선에서 결혼이란, 너무 극단적이어서
 오히려 진심으로 와닿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장난으로 치부한다.
 
 

장난 아니야. 네가 알던 박찬열이 20년 동안 
약혼자임을 숨기고 친구로 지냈다,
너를 속였다 그렇게 생각해.”
 
 

괜찮잖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관계 변화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좋다. 내가 건넨 말이 자연스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박찬열이 맞고, 연인이라는 단어는 
그저 관계를 정의하는 허울에 불과하므로 
경 쓸 것은 없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두려워하는 우리이기에 오히려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완벽하다.
 
 
 
나 당장이라도 너에게 키스할 수 있어.”

 
미친. 뭐라는 거야.”
 
 

남녀 간에 친구인지 아니면 연인이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이성인지 확인하려면 키스 가능 
유무로 확인한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확인한 건
10년도 더 된 일이다. 자가 진단한 그 때의 내 답은,
마늘을 왕창 먹은 그녀라도 입 맞출 수 있다 였다.
 
 
 


무엇보다 나 네 이상형에 부합하는 남자야.”
 

혹시 양심이 없어? 내 이상형 좀 빡센데.”
 
 



"……."
 
그러는 넌 무드가 없어? 결단코 분위기에 맞춰줄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 때문에 미간이
 짜증스레 좁혀졌다.
 
 
  


네가 곁에 있던 20년 동안 나는 내 할 일 잘 해왔고
안정적인 직장도 있어. 너를 신경 쓰면서도 너에게 눈이
 멀지 않았고 뭐가 중요한 지 정도는 알아.”
 
 
  
…….”
 
 
지금의 나에게 중요한 건 너를 놓치지 않는 거야.”
 
 
언제까지나 어리고 철없이 남아 있을 우리가 아니다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나는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가정을 이루며 아이를 낳겠지
그럼 언젠간 우리의 사이는 소원해질 거다.
 
 
 
가족끼리 친해지는 사이. 그래서 그들의 아이마저도
 친구하는 사이. 그건 다 유토피아를 그리는 드라마 
속에서나 존재하는 이야기일 뿐. 특히나 남녀 
사이에서는 그렇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가 너를 잡는 게 좋지 않을까
친구에서 연인으로 달라지는 게 아니라 연인이 
됨으로써 앞으로 달라질 우리 미래를 막는 게 아닐까.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녀를 바라본다.
 
 


결혼하자, 평생을 곁에 있어줘.
 
 

일생에 단 한번뿐인 프러포즈를 멋없이 이런 식으로
 저질러 버렸다. 그 흔한 반지도, 꽃다발도 없이 곱창
 먹다가 받는 그녀에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나중에 제대로 해줄게.
 


"두려워 하지 마. 절대 달라지는 건 없어.”
 
 
우리 사이는 달라지지 않아. 여전히 난 네 집을
넌 내 집을 오고가며 함께 밥을 차려먹고 영화 보고 
술을 마시고 그러다 잠이 들면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부은 얼굴을 비웃고.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찬열이가 열심히 하던 글로우 스케치 루브르 박물관 도안.
 

굳어진 그녀를 닮은 모아이 석상.
 
.
.
.

※만든이 : 로웨나님 
 
<덧>

안녕하세요. 로웨나입니다!
이야기 속 그녀의 연애관은 저의 연애관이랍니다
제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린 아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마음이에요.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
 틀렸다거나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저는 원래가 개인적인 영역이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라 제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래야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서로에게 원하는 걸 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연애가 전부가 아닌 남자라고 
이상형을 말해 왔던 것 같아요!
 
정리해서 말하자면 일과 연애 사이의 
밸런스를 현명하게 조율하는 멋찐 사람이 
이상형이랄까요ㅎㅎㅎ 그런 어른스러운
 사람 너무 매력 있지 않은가요?
 
그럼 여러분사랑하고 오늘도 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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