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당신에게 [단편] (by. 로웨나)


1.
백현이 사막 밤의 별처럼 음표가 어지러이 수놓아져
 있는 악보를 팔랑 넘긴다. 그의 발밑에는 악보와는
 정반대로 옷가지가 깔끔히 정리된 캐리어가 얌전히
 펼쳐져 있다. 첫 페이지를 펼치고는 보면대에 걸쳐
 놓았던 바이올린을 집어 든다. 눈을 감는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보는 거야.



활을 높이 추켜들고 현 위로 내리긋는다.


백현은 바이올리니스트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시절엔 신동, 조금 더 커서는 천재, 콩쿠르에서 이름을
 날린 후에는 동양의 파가니니. 그리고 여전히 세계는 
그의 행보에 이목을 집중하고 지판 위에서 춤추는
 그의 손가락에 감탄한다.


 
끼익-. 신경을 날카롭게 거스르는 소리가 방안에 울린다. 
의도하지 않은 소음에 백현은 미간을 좁힌다. 
하지만 현을 누르는 손가락과 유려하게 활을 움직이는 
오른팔은 멈추지 않는다. 길쭉한 손가락이
 네 개의 현을 일관성 없이 뒤죽박죽 짚는다.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히다 흘러내린다. 
음폭이 넓은 구간을 연주하는 그의 활끝이
 곡선을 크게 그린다.





"……."


그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춘다. 재생되던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멈춘 모습 
그댈 백현은 눈을 깊게 감는다. 천천히 악기를 내린다.
 그의 손에 힘이 풀리지만 손에 쥔 것을 놓치지는 않는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아니잖아. 이러면 안 되잖아.



정적이 낮게 깔린 방바닥에 그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울음기가 섞인다. 백현은 천천히 무릎을 굽힌다.



망설임도 미련도 없이 바이올린을 흰색 하드케이스에
집어넣고는 캐리어를 닫고 일으켜 세운다.




세계는 여전히 백현을 주목한다. 파가니니가 하늘에서 
내려준 환생이며 영원한 한국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정작 백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지금의 
세상은 그렇다.







2.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 그녀가 찬장을 
열고 홍차 티백을 꺼낸다. 
얼마 전 그녀의 집에 방문한 오랜 은사가 
그녀에게 건네준 다즐링이다.




물이 끓을 때 즈음 아일랜드 식탁에 두 손을 걸치고 
몸을 기댄 그녀가 창밖을 바라본다. 눈이 내린다.
 아직 쌓인 것은 아닌데 곧 쌓일 것 같다.



내리기 시작한 지 좀 되었는지 흰색 솜뭉치가 흙바닥
여기저기 내려앉아있었다. 제 몸뚱이보다 따뜻한 
흙에 닿아 녹다가도 그 위에 다시 눈송이가 얹히면 
합쳐져 몸을 불리기 시작한다.



커피포트의 버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그녀가 다시 창밖 멀리를 바라본다. 
퇴근 시간인데도 사람이 없어 걸어오는 인영이 
더욱 눈에 띈다.



그래도 정확히 알아볼 정도는 아닌지 그녀가 눈살을
 찌푸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좀 더 오래 본다. 
누구지. 익숙한데. 모르는 사람일 확률이 더 큰데도 
그녀는 눈을 돌리고 싶지 않다. 누군지 알아야
 할 것만 같다.



곧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동공이 확장된다. 
분명 저 아이는. 식어가는 찻물은 아랑곳 않고 그녀가
현관으로 향한다. 천천히 걸어 도착한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열지는 않는다. 손은 손잡이를 잡고 눈은 그 손등을
 바라본다. 지금쯤이면 문 앞에 서있을 상대방은
 초인종을 누르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다. 
그녀가 문을 천천히 밀어 연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변백현."




백현이 그녀가 눈앞에 보이자마자 인사할 틈도 없이
 말한다. 뒤늦게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올려다본다. 
긴박한 내용과는 다르게 표정도, 어투도 분명히 
무덤덤한데 어딘가 위태롭다.




그녀는 그런 백현을 보다가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간다. 
커피포트를 열고 1인분의 물을 더 담아 다시 데운다. 
홍차 티백을 하나 더 꺼낸다.



백현이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양손에 
나눠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3.
신발을 벗고 식탁에 앉아 홍차를 다 마실 때까지 
백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재촉하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아 무심하게 
책을 읽기만 한다. 비록 삼십 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책장을 한 번도 넘긴 적은 없더라도.




바이올린이 잘 안돼요. 백현이 말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책을 식탁에 던지듯 내려놓는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백현의 말에 집중한다.



"여전히 하루의 반 이상을 연습으로 보내는데 
자꾸 손가락이 꼬이고 음이탈이 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백현은 단 한 번도 
그녀의 눈을 보지 않았다. 
마룻바닥에 붙은 먼지 세는 것도 아니고
 고개를 땅으로 처박은 채 입만 움직였다.





나 청소 얼마나 열심히 하고 사나 검사하니? 
하필 오늘 바닥 안 쓸었는데. 그녀가 생각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간다.

머리 양옆 그의 관자놀이에 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그의 고개를 들어 올린다. 텅 빈 그의 눈과 마주한다.



"아가, 넌 그게 문제야."




아가. 그 옛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스물 한 살의 
성인이 된 백현에게 그녀가 말한다.




"하루의 반을 연습이라니. 그러다가 손가락에 
염증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된다고 했지?"




바이올리니스트는 물론이거니와 손가락이 생명인
 연주가 누구에게나 부상은 치명적이다. 
하물며 염증처럼 일반인에겐 가벼운 질병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가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편다. 오른손을 들어 
그의 구불구불한 머리칼 위에 올린다. 백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우유부단한 길이에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졌다. 
수트빨은 잘 받겠네-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천천히 쓰다듬는다.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하루의 반 이상을 연습으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백현이 말하는 
하루는 일반적이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줄여가며 몸이 망가져 가는데도
 개의치 않고 연습에만 매달렸을 것이 분명했다.




세계가 지워주는 짐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아이는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연습 시간 줄여. 그래도 돼, 백현아."




연습을 줄여도 된다고. 너에게 지워주는 부담을 
조금 모른 체해도 된다고.




하지만…! 무언가 반박하려는 백현의 입을 그녀가 
손으로 막는다-로맨틱한 분위기가 아니다. 
곱상한 아이 납치하려는 흉악범처럼 손바닥으로 
그의 입과 코를 덮어버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청개구리를 삶아 먹었는지 어렸을 땐 어떻게든 
연습 빼먹으려고 용을 쓰더니 다 커서 
말 안 듣는다며 툴툴거린다.

아, 그리고.




"당분간 여기서 지내. 방은 2층 아무 데나 쓰고."




그녀가 거실에서 가장 가까운 방문을 열면서 말한다. 
얼핏 침대 비스름한 것이 보이는 걸 보니 그녀의
 방인 모양이었다. 그녀가 들어가다 말고 백현의 
캐리어를 힐끗 본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으로 쳐들어온 것 같긴 한데."




백현에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4.
그녀는 백현이 신동과 천재를 넘나들던 시절의 
선생님이었다. 백현의 나이 12살, 
그녀의 나이 21살이었다.




백현을 만나기 1년 전, 바이올린으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녀는 수전증으로 은퇴했다. 짚어야 
 곳을 빗겨가 미묘하게 벗어나는 음정과 악기
 몸체를 고정시켜야 할 손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베개 밑에 손을 넣고 눌러보기도,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손을 고정시키면 손목이
 흔들렸고 주먹을 쥐면 주먹이 통째로 흔들렸다.



무엇보다 전에는 밥 먹는 것보다 쉬웠던 곡을 
실수 없이 완주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손도, 정신도 흔들렸다. 부모님에 의해 떠밀리듯 
시작했던 바이올린이었다. 남들처럼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울었다. 그럭저럭 울지 않고도 
버틸 수 있게 되었을 때에는 하루 종일 우울했다. 
무기력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언젠가 장난스럽게 바이올린을 못하게 된다면 
매일 놀아야지-라고 생각했던 건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때쯤 백현을 만났다. 지금보다는 머리카락이 좀 더
 밝고 피부도 맑아 딱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또래 아이보다 조금 더 작았던 백현은 4/1 
바이올린-어린아이의 신체에 맞춘 바이올린-을 
들고 그녀의 집을 찾았다.




백현의 엄마는 그녀의 엄마와 잘 알고 지내던 사이인데 
가끔 안부 문자를 주고받을 정도로 그녀와도 나름
 친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 아들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엄마가 선생님한테 바이올린 배우래요.'




12살에게 21살은 한참이나 큰 어른이었을 텐데도 
백현은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어린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엄마가 하라고 해서 하는 거니? 너는 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물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요. 
잘하는 것도 하면서 살아야지.'




어디서 배운 건지-만화에 그런 표정이 자주 나오긴
 하더라- 백현이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녀를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저는 바이올린을 잘 하니까 바이올린을 
해야 해요.라고도 덧붙였다. 어린 백현은 참 당돌했고
 자신감 있었다. 어린아이의 이유 있는 자신감은 
그녀를 웃게 했다.




처음 백현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에게 자신을 투영시켰다. 
그녀의 어릴 적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엄마에게
 떠밀려 처음 활을 쥐었던 그녀처럼 백현도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어린아이는 바이올린을 좋아했다. 자신의 재능을 
사랑해서 백현은 바이올린을 사랑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저의 어린 시절과는 달랐다. 
음악에 몰입하는 백현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동화 속 모습 그 자체였다.



그래서 백현과의 연습을 시작했다. 바이올린이 
그녀에게 재능을 주었던 만큼의 사랑을 돌려주지 
못해서 자신은 벌을 받았지만, 이 아이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 아이에게조차 불행이 일어난다면 
건 정말 하늘이 인정머리가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에 다시 한 번 마지막 남은 희망을 그러모았다.
 다시는 바이올린을 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지쳤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부딪히는 것.
그녀가 품은 희망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집 거실에 있는 장성한 
사내는 세계가 사랑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5.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에 그녀가 눈을 뜬다. 
그러나 평소보다 창밖이 밝은 느낌에 커튼을 젖히니
 간밤에 눈이 발목께까지 쌓인 모양이었다.


흠집 하나 없는 흰 눈 카펫 위에 햇빛이 반사되어 
그녀의 창문으로 정확히 빛을 쏜다. 분명 자외선도
 같이 반사되겠지. 맨 얼굴이라 혹시 주근깨라도 
생길까 다시 커튼을 내린다.



그녀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아침을 차린다. 
느지막이 일어나 팬에 소시지와 아스파라거스를 
굽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그녀의 엄마가 언제 보내준
 건지 모를 피클이 있어 쾌재를 부른다.




"……."




접시에 음식을 담던 그녀가 2층에서 들려오는 현을 
튕기는 소리에 모든 동작을 멈춘다.




"내가 이제…. 혼자 사는 게 아니었지, 참…."




그녀가 문득 깨달은 듯 중얼거린다. 일정한 음이 
미묘한 차이를 두고 반복되는 것을 보아하니 백현이
튜닝이라도 하는 듯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탈리안 소시지 한 개와 아스파라거스 조금을 
더 굽는다. 옮겨 담을 접시를 꺼내기 위해 찬장을 연다.




"하숙집 아줌마가 된 느낌이야."




그녀의 머리 위치보다 조금 더 높은 찬장에 발꿈치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또 한숨을 쉰다. 
접시가 없다. 손님도 잘 찾지 않는 이 집에 굳이 
접시가 하나 더 있을 이유는 없지. 오후에 장이라도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접시 대신 대접을 꺼낸다.




"한숨을 두 번 쉬었으니 두 숨."




병맛 같은 헛소리도 중얼거린다.










6.
늦은 아침을 먹은 뒤에 그녀는 백현과 집을 나섰다. 
설거지는 미루고 카디건을 걸쳐 입는 그녀를 보며 
백현은 말없이 신발을 신는다.




"어디 가게?"




현관에 멀뚱히 서서 의아하게 묻는 그녀를 백현이
 바라보다가 제 패딩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친다.
 지퍼를 목까지 끌어올려 잠근다.





"선생님 따라가게요. 장 보러 가는 거 아니에요?"




그가 별 걸 다 묻는다는 듯 앞머리를 매만지며 대답한다.




"뭐야, 어떻게 알아?"
"선생님 손에 장바구니."




아…. 그녀는 노란 장바구니가 들린 손을 무안하게 
려다보다가 백현에게 말한다.




"근데 나 팔은 빼줘야지…. 이러고 어떻게 나가."




백현이 팔을 집어넣고 지퍼를 잠가버린 탓에 패딩에
 갇힌 그녀가 밑으로 삐죽 튀어나온 손끝을 파닥거린다. 
몸을 좌우로 돌려대자 뼈가 사라진 팔 마냥 패딩 
소매가 휙휙 휘둘리다가 백현의 등허리에 부딪힌다.


백현이 그녀를 본다.




"아, 귀여워."





그녀가 움직이던 몸을 바로 세운다. '말'이라기보다는
 웃음소리에 섞인 옹알이 같아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하다가 백현을 본다. 아무래도 제대로 
들은 게 맞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백현이 웃던 입매를 
어색하게 유지한다. 변명할 거리를 찾는 것처럼 
눈알을 데굴데굴 굴린다.



"나도 알아."




그녀가 대답한다. 내가 살다 살다 제자한테 칭찬받는 
날이 오다니. 그녀가 덧붙인다. 백현이 입꼬리를 
내려 앙 다문다. 왜인지 그녀는 모른다. 그냥 그가 
기분이 나빠 보인다고 생각할 뿐이다.




"가요. 그럼."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백현이 그녀가 입은 패딩 
팔 두 쪽을 한 손에 잡고 질질 끈다.




"야, 야! 이거 놔! 선생님한테 그러는 거 아냐!"




이 버릇없는 노무 시키! 그녀는 소리치며 끌려간다.











7.
백현이 그녀의 집에 들어온 이후로 한동안 쓰지 
않던 연습실은 그의 차지가 되었다.




"생각보다 깨끗하네요."
"당연하지. 그럼 뭐, 내가 너무 슬퍼서 이 방을 
못 들어왔을까 봐? 비련의 영화 주인공처럼?"




전부 거짓말이다. 그녀는 수전증이 생기고 1년은
 연습실에 발조차 대지 못했고 그다음 1년은 문고리에
손만 얹을 수 있었고 그다음 해부터 1년 동안은 연습실 
안에서 울기만 했다. 방음이 잘 돼서 소리 지르며 
어도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3년을 살다가 바이올린을 잡을 수 있었다. 
무대에 서지는 않지만 그녀는 여전히 선생님이다.
 바이올린 유망주들을 키워낸 것도 몇 돼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입소문도 탔다.



백현이 연습실 구석에 있는 피아노 커버를 손으로 
쓸어낸다. 의자를 빼고 앉아 건반에 손을 올린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상을 찌푸린다.



"오늘따라 밖이 좀 시끄럽네."

"옆집이 공사를 한다나 봐."




얼마나 요란스러운 공사를 하는지 방음이 투철한 
연습실조차도 막아내지 못하더라. 백현이 신경질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이중창을 더욱 여미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녀가 백현의 옆자리에 앉는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백현이 그녀를 본다.




"다짜고짜 신청곡이에요?"
"응. 오랜만에 듣고 싶어."




그녀가 백현에게 바이올린과 활을 쥐여준다. 장난감같이 
작던 아이의 어릴 적 바이올린은 어디 가고 어느새
 커버린 백현에게는 그녀가 가진 것과 같은 크기의
 바이올린이 있었다.




타고나길 곱고 길지만 뼈마디가 굵은 손가락도, 
연습으로 굳은살이 베긴 손도 제법 사내 티가 난다. 
그녀는 연주에 심취한 백현을 본다.




"많이 컸네, 아가가."




백현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간다. 몰랐는데 
남자 같아. 그녀의 말에 백현이 연주를 멈추고 어깨에 
올렸던 악기 몸체를 천천히 내린다.




"당연하죠. 저 이 바닥에서 나름 일등 신랑감인걸요."
"근데 말하는 건 여전히 초딩이야."
"……."
"뭐 해, 빨리 다시 시작해."




백현이 다시 어깨에 바이올린을 얹는다. 
현을 활로 긁는다. G 현, D 현, A 현….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바이올린으로 고개를 돌린다. 
백현이 미간을 좁힌다.




"선생님 때문에 튜닝이 풀렸잖아요."
"그게 왜 내 탓이야."




백현이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며 조율하지만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거리의 소음 때문에 여의치 않다. 
공사 현장의 인부들이 떠드는 소리하며 드릴이 
나무 판을 뚫는 소리하며 시끄러워서 귀가 멀어버릴
 지경이다. 그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다. 



"도대체 저놈의 공사는 언제까…!"




백현의 말이 중간에 막힌다. 그의 귀 바로 가까이에 
다가온 그녀가 더욱 몸을 밀착시킨다.




"좀 조용히 해봐. 너 때문에 안 들리잖아."




그녀가 현을 순서대로 튕기며 줄감개를 조인다.
 백현은 순간적으로 호흡을 멈춘다. 숨을 쉬면
 괜찮아질 텐데도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포클레인 소리에 잘 안 들리는
 모양인지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백현의 어깨에 고개를 
더욱 기울인다. 야해-. 해서는 안 될 금단의 생각이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백현이 얼굴을 붉힌다.


정신 차려, 백현아. 상대는 아홉 살 많은 아줌마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너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일에 짜증 내다간 성격 나빠진다."




이미 나빠질 성격도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백현에게서 멀어진다.
푸하-. 그와 동시에 백현이 숨을 몰아쉬며 헥헥거린다. 
그녀가 그런 백현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8.


"무거워."




그가 투덜거린다.




"난 따라오라고 한 적 없어."
"누가 뭐래요?"




싸가지 없는 노무 시키. 백현이 다른 곳을 보는
 틈을 타 그녀가 눈을 흘긴다.




"그러게. 뭐라고 안 했네. 내가 미안."




뽀득뽀득 길가에 쌓인 눈을 밟으며 그녀가 말한다. 
어릴 땐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손톱만큼은 있었는데 
크니까 아주 까슬까슬 사포가 따로 없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않기로 한다. 한 대 맞으면 아플 것
 같으니까. 백현과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보러 나온다.





백현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걷는 탓에 정수리에 솟은 잔머리 몇 가닥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내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 보폭이 큰 사람이 눈을 밟은 건지 발자국을
 따라잡기 위해 그녀가 다리를 뻗다가 가끔 휘청거린다.
 백현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어깨를 받친다.



"그러다 넘어지면 안 아파요?"


"그렇겠어?"




그녀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본다.




"휘청거리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휘청휘청이 아니라 성큼성큼이야."




그녀는 곧 죽어도 지금 신은 신발만큼은 사수해야 했다. 
눈 묻어서 젖으면 수습하기 귀찮단 말이야.
 아끼는 신발인데. 그 사이에 그녀가 한 번 더 미끄러진다. 
백현이 그녀의 허리를 오른팔로 급히 감싸 안는다. 




"나 이러다 같이 넘어져서 손가락 골절되면 
선생님이 내 인생 책임지기."




미안. 그녀가 곧바로 사과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다. 
신발이 푹푹 눈길을 파고 들어가 신발에 물에
 스며들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저렇게 더러운 
성질머리를 끌어안고 평생을 살아갈 용기와 
끈기가 없다. 그걸 그녀도 알고 있다.




백현이 앞서가는 그녀를 킥킥 웃으며 바라보다가 
휘적휘적 걸어 따라잡는다. 남자 패딩이라 아예 
덮여버려 숨어버린 그녀의 손을 패딩 째로 
낚아채 잡는다. 그녀가 백현을 올려다본다.




"내가 넘어질 것 같아서. 내가 넘어져서 손가락 
골절되는 건 선생님 책임 아니에요."




그럼 잡아도 되죠? 백현이 웃으며 묻는다. 
그녀는 그런 백현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에 힘을
주며 잡아 빼던 움직임을 멈춘다.




"그래."
"……."
"나는 손이 시려서."




모른 척 눈길을 걷는다. 신발에 물이 
스며 발끝이 시리지만 그냥 걷는다.










9.
그녀 나이 서른인데 남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때에는 아빠가 있었다. 7살이 넘어서는 음악 때문에 
남자아이와 소꿉장난할 시간도 없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백현이 유일한 남자였고 그다음엔 모든 게 귀찮았다.


그러니까, 그녀 인생에 남자란 부모님의 닦달에 
몇 번 나간 선 자리가 전부였다고.




그런 그녀에게 지금 눈앞의 남자는 아주 희귀하다 못해
 손에 꼽을 경우의 수라는 말이다. 이 남자는 요즘
 봐 주고 있는 아이의 레슨을 끝내고 택시를 잡는
 그녀를 붙잡아




'어디 가요?'




다짜고짜 느끼하게 물었다. 허우대는 멀쩡한 남자가 
웬 시정잡배 짓을 하나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간다며 예의 바르게 대답해주었다.




'같이 가도 될까요?'




아, 이건 좀 놀랄 만하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번호를 묻는
 멘트로 보기에는 너무 뜬금없고 저돌적이라는 거다. 
번호가 아니라 자는 게 목적이었던 건지 남자는 멋있는 
들이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미약하게 술 냄새도 났던 것 같다.




'우리 집에요?'
'그게 싫다면 우리 집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 정말. 
쿨한 뉴욕 남자 행세를 하고 싶은 건가. 그녀의 눈에는
 느끼한 마가린 덩어리로 보이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택시 문을 열어 그를 태웠다. 남자가 그녀를
 앉히기 위해 깊숙이 들어갔지만 그녀는 택시 문에 
몸을 기대고는 팔짱을 껴고 물었다.




'어디 살아요?'
'우리 집으로 갈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나는….'




남자는 그녀의 귀에 대고 주소를 속삭였다. 속으로
 쌍욕을 읊조린 그녀가 택시 기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건너편 호텔에 사신다네요. 그쪽으로 가주세요.'




어색한 미소와 함께 택시 문을 닫았다. 출발하는 택시 
뒤로 막힌 공간 안에서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도로에 흩뿌려지지만 혹여나 남자가 차를 멈추고 
그녀를 쫓아올세라 다른 택시를 잡기 위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





그게 불과 두 시간 전 일이다. 그 이후로 저녁 준비를 
하고 식사를 끝내고 과일을 먹을 때까지 백현은
 말이 없었다.




"왜 화가 난 거야?"
"화 안 났어요."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대화도 이제 질리기 시작한다.




"화났잖아."



"아니라니까요."




…그,그러니? 미안하다. 이미 속으로는 사과를 백 번도
 넘게 했다. 두 시간 째 반복되는 패턴이다. 쌀쌀맞은
 말투에 경직된 몸, 신경질적인 행동과 무엇보다 
몸에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가 분명히 화가 난 게
 맞다고 말하는데 끝까지 아니란다.




"네가 기분이 나쁜 게 아까 그 남자 때문이야?"




화가 난 건 아니라고 했으니 단어를 바꿔
물어보기로 한다. 그러자 백현이 그녀를 쳐다본다. 
눈빛에 뚫리는 최초의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 남자 때문 맞구나-. 
그녀는 다시 입을 연다.




"그 남자는…."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한다. 벽에 부딪힌 등과 손목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신음만 뱉어낸다
그 순간 백현이 그녀의 손목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만 놔주지는 않는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꽉 다물린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 




"……."
"화도 안 났다고."
"…그래."




백현이 그녀의 손목을 놓고 그녀와의 거리를 벌린다.
 방으로 들어가려는지 뒤를 돌아 읽던 책을 집어 든다.




"그럼."




백현이 멈춰 선다. 그녀는 손끝을 
바르작대며 그를 올려다본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거야?  백현이 뒤돌아서서 그녀에게로
 걸어온다. 그녀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처럼, 억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가 치워낸 것처럼 해방감 어린 그의
 눈에는 이미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다지 넓지 않은 거실은 끝에서 끝까지 그에게는 고작 
몇 걸음밖에 되지 않는 거리다. 그녀의 등이 벽에 
닿았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입을 맞춘다.



"잘 했어요."




백현이 새끼손가락 길이만큼의 공간만을 남겨두고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어낸다. 그가 내쉬는 숨결이 뜨거워
 그녀가 어깨를 움츠린다. 그를 올려다본다.




"따라가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연상연하 커플을 보면 궁금했다. 자기보다 어린 남자가 
이성으로 느껴질까. 특히 이 아이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고 1년이나 더 후에야 응애-하고 태어났는데?


그녀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심장 박동이 감당이 안 된다. 
숨을 몰아쉰다. 조금 진정이 되자 말한다.




"보이는구나. 남자로."




30년 살면서 처음 알았다.


.
.
.


※만든이 : 로웨나님

<덧>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제가 너무 늦게 왔죠ㅠㅠㅠㅠㅠㅠㅠ
절 때리셔도 좋아요....ㅠㅠㅠㅠ
준비하는 시험이 너무 바빠서 그동안 찾아올 
생각을 못한 쓰레기같은 인간이랍니다 제가..ㅠㅠ
앞으로는 더 열심히 할게요!
오늘은 단편이에요! 예전에 써놓은 거긴 한데 
어쩌면 지나가다가 보신 분들이 혹시나! 계셨을 수 있어요.
별 거 아니지만 오늘 하루의 힘이 되길 바라면서
독자 여러분 모두 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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