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by. 탄디)

 '탄디'님의 첫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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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GM : In the House, In a Heartbeat - John Murphy


 
처음 만났을 때부터, 우리의 만남은 잘못됐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의 커다란 눈망울, 오똑한 코,
하트 같은 입술에 속아서 넘어가서는 안 됐었다
그의 숨이 넘어갈 듯한 다정한 미소와,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속에는 사려가 넘쳤던 말투에, 넘어가서는 
안 됐는데. 그를 처음 만났던 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한 명도 지나가지 않았던 한적한 공원이었다
드라마 작가를 준비하고 있던 내가 시나리오 구상을 
하다가 도저히 안 풀려서 산책을 하려고 집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도경수라는 남자와 처음 만났다.
 
 
그날따라 밤하늘 위 하얀 달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눈부셔서, 마치 전등이 내 머리 바로 위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검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주머니에 손을 푹 넣고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나는 공원 한 가운데에 어떤 남자가 쭈그려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대체 이 밤에, 그것도 산책로
 한 가운데서 뭐하는 거지, 저 남자는?
 
 
 
"...?"
 
 

 
 
 
자세히 살펴보니 어디가 아픈 건지 야옹, 거리며
 작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면서 바닥에 누워 있는 
고양이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 남자였다
검고 짧은 머리에 흰자가 돋보이는 커다란 눈망울,
부드러움을 엿볼 수 있는 그의 미소. 그는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채 쭈그려 앉은 채 고양이를 말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평소부터 고양이를 워낙 좋아하는 
나인지라 고양이가 어디 아픈 건가 싶어서 괜스레 
호기심이 났던 나는 그에게로 선뜻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지라 
약간 장난기를 담아서.
 
 
 
저기, 이 혹시 이 고양이 집사 분이세요?
 
 
 
그러자 그는 한참동안 말없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약간 가라앉아있는 미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순둥순둥한 첫인상답게
 목소리 또한 정말 부드러웠다.
 
 
 
"아니요."
 
 
"..."
 
 
"갑자기 왜 이럴까요, 이 고양이가. 아까부터 길에
 계속 쓰러져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걱정돼서 좀 보고 있었어요."
 
 
 
뭐야,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니었어
그때, 그는 갑자기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더니
 나를 다시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고양이, 좋아하시나 봐요.”
 
 
그럼요, 귀엽잖아요. 도도하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여서 정말 
좋아한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앞의 남자도 
밝게 웃으면서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의 미소에 내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주책이야, 진짜. 솔직히 말해서 이 앞의 남자는 정말
 내 스타일이었다. 생김새부터 말투, 성격까지 전부 다
나는 애써 남자에게 자라나기 시작하는 호감을
무시한 채 다시 말했다.
 
 
 
길고양이인 모양인데, 어디 다쳤나 봐요?
 
 
그러게요, 왜 이러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내가 그의 곁에 조금 더 다가가서 고양이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 때,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 애, 앞다리가 없네요.
 
 
 
"....!!!"
 
 
 
내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상처를 
보기 싫다는 표시로 고개를 왼쪽으로 급하게 돌렸다.
그리고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뒤 심호흡을 
한 나는 고양이의 앞다리 쪽을 살펴보았다. 사실이었다
그가 말했던 대로 고양이의 앞다리 한 짝이
 완전히 사라져있었고, 그 자리에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새빨간 피가 범벅이 된 채였다.
너무 참혹한 광경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끔찍한 모습에 나는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마 교통사고라도 당한 게 아닐까요?
 
 
 

 
 
 
내 옆의 남자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그의 말대로 정말 교통사고라도 당한건가 
싶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생긴
 의문점을 남자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 근처에는 차가 지나갈 만한 도로가 없는데요
게다가 다리가 잘렸는데 이 공원 한복판에 있다는 것도
 좀 이상하구요. 도저히 이 상태로는 걸을 수가 없을 텐데.
 
 
"...예리하네요, 당신.
 
 
 
그러자 내 대답을 들은 남자가 제법이라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고양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에게 기본이죠, 라고 대꾸한 나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픈 
아이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동정심이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얼른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다가 과다출혈이나 2차 감염으로 죽겠어요.
 
 
그래요? 내가 보기엔 괜찮을 것 같은데.
 
 
"? 그게 무슨 소리에요?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다리가 잘렸는데!
 
 
 
내가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바라보면서 말하자,
진심으로 의문이 들었는지 남자는 나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뭐지, 이 남자는
대체 정신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으면 이런 잔혹한 
발상을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눈앞의 남자에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의아하게 나에게 말했다
그건.. 일반 성인 남성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순수하고, 또 인간이라기에는
 잔인한 말이었다.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하지만.. 아직 나머지는 잘리지 않았잖아요
가장 중요한 머리도 남아있고.
 
 
...저기요, 지금 장난하는 거죠?
 
 
 
만약 이게 진심이라면, 나는 생각보다 위험한
 사람을 만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능청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와는 다른, 너무나 이성적인 말투였다.
 
 
..당연히 농담이죠, 다리가 잘렸는데 
얼른 병원에 데려가야죠
그냥 심심해서 장난 좀 쳐본 거 에요.”
 
 
장난이라니..
 
 
그런데 근처에 동물 병원이 있던가요
좀 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나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이곳에 이사를 온지
2달도 채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근처의 지리도
 아주 대충 파악한 참이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전 이곳에 
이사 온지 얼마 안 됐거든요.
 
 
.., 그래요? 얼마나 됐는데요?
 
 
1달 조금 넘었어요.
 
 
..어디서 살아요?
 
 
 
그의 말에 나는 대답해줘야 하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것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남자한테 개인 정보들을 알려줘 봤자 
그다지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의 얼굴에는, 어느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을 
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저기 바로 앞에 보이죠? 저기서 살아요.
 
 
, 3층이요.
 
 
.
 
 
 

 
 
 
내 바로 뒤 조금 멀리 떨어져있는
 아파트를 가리키면서 말하자
남자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
 
 
 
 
“...?”
 
 
 
....잠깐, 그런데 내가 사는 층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그를 쳐다보면서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층수는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아직 말 안 해줬는데..
 
 
, 찍었는데 맞았나보네요. 저도 3층 살거든요.
우연이네요.
 
 
 
그가 우연이라는 듯 활짝 웃으면서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했다. , 그런 거였구나
그런데 뭔가 찝찝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뭔가 이상해. 갑자기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남자가 고양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고양이는 어떻게 하죠?
 
 
 
그의 말대로다. 이 고양이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담
피가 많이 흘러나와서 바닥까지 조금 젖어있는 
상태인데, 이대로 뒀다간 죽을 것이 틀림없다
내가 가여운 눈길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고양이의 상처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 챘다.
 
 
 
저기, 이 고양이 상처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 뭐가요?
 
 
 

 
 
 
이 상처, 교통사고치고는.. 
너무 깨끗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이건요, 마치 누가 악의를 품고 
일부러 잘라낸 것 같은데..
 
 
....
 
 
 
처음부터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던 고양이의 상처
남자에게 말한 대로 교통사고 치고는 나머지 부위가
 이상할 정도로 멀쩡하고 깨끗하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나쁜 생각이 조금씩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뭔가 다른 사고가 있었겠지
 때, 눈앞의 남자가 갑자기 차가운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서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거에요?
 
 
? .. 그냥,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드세요
.. 직감이라고 해야 하나. 옛날부터 감이
 좋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왔거든요.
 
 
...흐음.
 
 
 
 
내가 멋쩍게 웃으면서 대답하자,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여전히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한참동안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분위기는 다시 바뀌어서, 아까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호감을 느꼈던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도경수에요, 나이는 25."
 
 
"..."
 
 
"그쪽 이름은요?"
 
 
"저는... ㅇㅇㅇ라고 해요. 나이는 25살이에요."
 
 
"아하, ㅇㅇ씨라 하는구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갑이네요."
 
 
 
그의 미소에 홀려버리기라도 한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그에게 약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없어지고 나 역시 그와 손을 잡아서 
악수를 했다. ..사실 내 타입이라서 그런 것 같아
그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내 볼이 발갛게 물드는 걸 느꼈다. 정신 차려, ㅇㅇㅇ
설마 첫 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 하는 건 아니지?
 
 
 
...?
 
 
 
..그런데, 나는 경수 씨와 악수를 마치고 손을 뗐을 때,
내 손에 뭔가 끈적끈적한 게 묻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지? 내가 힐끔 오른손을 살펴보려고 
할 때, 갑자기 그가 내 시선을 돌리기라도 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와서 말했다
조금만 더 다가오면,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올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의 다정한 미소에 나는 다시 
마음을 뺏겨버려, 오른손의 이물감에 대한 의혹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동물 병원이 좀 멀어요."
 
 
"..."
 
 
"차를 타고 가야할거에요."
 
 
.. 그렇구나. 근데 전 차가 없는데...
 
 
"괜찮아요, 저한테 있어요.
 
 
우와, 능력 좋으신데요? 저랑 동갑이신데 
차도 있으시다니..
 
 
 
세상에, 얼굴도, 성격도 내 타입인데 심지어 
경제력까지 갖췄다니. 나는 눈앞의 남자를 놓치면 
앞으로 평생을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간단한 메이크업밖에 하지 않은 
내 민낯과 추레한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나온 것이
 너무 후회가 됐다. 아우, 왜 이런 거지같은 차림새를
 했을 때 이런 멋진 남자를 만난 거야. 이런 모습에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거 자체가 이상하다
내가 울상을 지은 채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전히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이왕 병원 가는 거, 우리 같이 갈래요
저 혼자는 좀 심심해서 그런데."
 
 
...!!
 
 
 
 
찬스다. ㅇㅇㅇ. 넌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그냥 혼자가도 되는 동물 병원을, 고작 심심하다는 
이유로 기름값까지 낭비하면서 굳이 나와 함께 가고 
싶다는 말은 백퍼센트 그거겠지. 그도 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바로
 가겠다고 했다간 내가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이진 않을까
내가 고민하느라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갑자기 약간 
시무룩한 얼굴을 하더니 뒤를 도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의 뒷모습이 너무나
 처량해보였기에 내 안의 모성애가 들끓었다.
 
 
 
"..싫으면 갈 필요 없어요, 저 혼자 갈 테니까."
 
 
결국 나는 그를 놓칠 새라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가며
 갈게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린 그가 좋아요,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차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검은색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와 맞게, 차도 검은색이었다. 기종은 잘 모르겠지만 
하얀 달빛이 차에 비쳐서 반들거리며 광택이 났다
능숙한 솜씨로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운전대를 잡은 
그의 옆 조수석에 멋쩍게 앉은 나는 안전벨트부터 맸다.
그런 나를 본 경수 씨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보통 안전벨트 잘 안 매지 않아요? 귀찮으니까."
 
 
 
내가 부모님 때문에 원래 어렸을 때부터 안전을
 중요시하면서 살았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하자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맞장구를 쳐주는 그의 모습에 조금씩 호감이 생기는
 그 때, 지금껏 신경 쓰였던 손의 이물감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살며시 오른손을 살폈다. 아까 그와 악수하고
 나서부터 생겼던 손바닥의 위화감. 땀치고는 너무
 끈적한 느낌이 들어서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참이다.
 
 
 
"...!!!"
 
 
 

 
..손 안에는, 가 묻어있었다. 마치 물에 푼 빨간 
포스터 물감을 보는 것 같은 새빨간 피. 갑자기 피를 
봐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 나는 최대한
 침착 하려고 노력했다. 아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피야 아까 고양이의 절단된 상처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본능적인 공포가 몸을 궤뚫는 느낌에 나는 부르르 
떨었다. 그에 화답하듯 뒷자석에 누운 고양이도
 그르릉거렸다. 내가 몸을 떨자 경수 씨가 힐끔 나를 
보더니 시동을 걸면서 자상하게 말했다.
 
 
 
"추워요? 히터 틀어줄까요?"
 
 
절레절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한여름에 히터틀기는 좀 그렇죠."
 
 
"...."
 
 
"여름에는, 시원해야죠."
 
 
 
잘 썩으니까.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리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그의 입에서 무언가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손의 피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던 나는 듣지 못했다. 결국 검은색 트레이닝 복에
 슥슥 문질러 핏자국을 없앤 나는 애써 웃으면서 
그의 말에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동물병원을 가는 동안 그와 대화를 나눴다
나이부터 좋아하는 것, 취미, 가족 관계
휴대폰 번호 등등 마치 내 개인정보를 조사라도
 하듯이 낱낱이 물어보는 그의 말에 어째선지 나는
 전부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최면에
 걸린 듯이 말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견딜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내 생각들을 전부 털어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게 만드는 그런 간질간질한 목소리였다.
 
 
 
"ㅇㅇㅇ , 나이는 25."
 
 
"..."
 
 
"취미 겸 좋아하는 건 글쓰기."
 
 
"...."
 
 
"장래희망은 드라마 작가."
 
 
"..."
 
 
"가족관계는 부모님, 남동생 하나."
 
 
"...맞아요."
 
 
"그 외에 싫어하는 건 오이, OO4402호에 살고,
고양이는 좋아하고, 고등학교는 ㅁㅁ, 대학교는 
ㅁㅁ대학교를 졸업했다. 최근에 빠진 음악은 
드라마 ㅁㅁOST, JUST LOVE."
 
 
"...!!!"
 
 
"...어때요, 이 정도면 잘 기억하고 있죠?"
 
 
 
소름 돋게도, 경수 씨는 내가 성의 없이 대답한 것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그냥 대충 듣고 넘기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째선지 조금 무섭기까지 할 정도로 나에 
대한 것을 알고 싶어 하는 그에게 나는 약간 거리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약간의 정적이 있은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말 놓을까요? 동갑인데."
 
 
끄덕.
 
 
"ㅇㅇ, 나에 대한 걸 기억하고 있어
아까 말해줬잖아."
 
 
 
흠칫했다. 사실 내가 말한 것처럼 경수도 나에게 
자신의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부터 취미
가족관계까지 모조리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충 흘려 넘겼던 나는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설마 다시 질문할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나는 결국 이름과 나이, 좋아하는 것만 말한 채 
나머지는 까먹었다고 그에게 순순히 자백했다
그러자 운전을 하며 싱글싱글 웃고 있던 그의 옆얼굴이 
갑자기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핸들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조금씩 들어갔다.
 
 
 

 
 
"...."
 
 
"....?"
 
 
"내가 전부 말해줬는데, 어째서 기억하고
 있지 않는 거야? ?"
 
 
"...저기, 경수야."
 
 
"불공평해, 내가 이렇게 너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너는.."
 
 
 
갑작스런 그의 태도 변화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그에게 쭈뼛거리면서 뭔가 말하려 할 때
갑자기 그가 다시 미소를 짓더니
 내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장난이야. 도착했으니까 내리자
고양이는 내가 챙길게.
 
 
 
이 남자는, 어디까지가 장난이고 어디까지가 
진심인 것일까.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매력적인 남자다, 도경수는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말인지 모르겠어.
 
 
 
"다행이다, 24시간 한다더니, 진짜 병원 문 열었네."
 
 
.. 그러네.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그의 뒤를 따라 나는 동물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잠시 대기한 뒤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에게 고양이의 상태를 물어봤을 때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수 밖에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속으로 애써 부정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의사 아저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충격적인 사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거, 교통사고나 그런 상처가 아니에요."
 
 
"..."
 
 
"상처가 보아하니 누군가 칼 같은 걸로 단번에
 잘라낸 모양인데... 어느 몹쓸 놈이 
이런 짓을 했는지, 쯧쯧."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일부러 잘라냈다. 어째서
아마 어느 미친놈의 장난일거라고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사의 말에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병원에서 
나온 뒤 바깥에서 차 시동을 걸 준비를 하는 
경수에게 갔다. 그리고 의사에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했다.
 
 
 
"..."
 
 
"...그렇대."
 
 
"그렇구나, 아팠겠네. 고양이는."
 
 
 
내 품안에서 얌전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다리를 잃은
 고양이를,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는 경수의 
시선에 나는 혹시나, 싶었던 그에 대한 의혹을 지웠다.
그래, 경수가 좀 묘한 분위기가 있다고 해도 설마 
그런 짓을 할리는 없겠지. 나쁜 생각하지 말자.
 
 
 
", 아까 거기 아파트라고 했었지? 데려다 줄게."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우리 사이는 급격하게 
까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다친 고양이를 버릴 수
 없어서 내 자취방에서 키우게 되었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 캣타워 등 여러가지 선물을 들고 찾아온 경수
또 드라이브하자는 이유로 밤마다 나를 불러냈던 경수,
드라마 작가 최종 공모전에 합격해서 뛸듯이 기뻐하는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안아줬던 경수
내 삶에 도경수라는 인물이 점차 자리를 확고하게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이제야 내 사랑을 찾아낸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경수와 만났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와 없는 시간이 오히려 더 적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는 1층 주차장으로 나보라는
 경수의 연락을 받고 서둘러 바깥으로 나갔다.
슬리퍼에 짧은 반바지, 후줄근한 티에 안경이라는 
상당히 편한 조합으로 나가는 게 좀 뭐했지만
보나마나 별 것 아닌 일로 불러냈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경수는 털끝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없잖아? 어디있는거야..?
 
 
 
내가 투덜대면서 핸드폰을 꺼내서 경수에게 어디냐고 
톡을 보냈지만, 경수는 평소처럼 바로 읽지 않았다
얘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불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을 때,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건, 촛불들이잖아? 자세히 보니 LED 촛불들이 
한꺼번에 켜져서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설마.
 
 
 
ㅇㅇ.
 
 
 
발 밑의 촛불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경수의 목소리를 
쫓았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올라가서 내려가지를 않았다
너무 행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터트렸다. 내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경수가 
내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는 순수하게 
웃으며 손에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바보같이 울긴 왜 울어. 이런 거 처음 받아봐서?
 
 
아니, 처음은 아니야..
 
 
...
 
 
푸하하, 농담이야, 당연히 너가 첫 번째지!
 
 
 
내 농담에 생각지도 못 했는지 벙찐 얼굴을 하는 경수.
나는 그가 너무 귀여워서 그에게 와락 안겼다
그러자 경수는 피식 웃더니 나에게 떨어져서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스프레이로 바짝 힘 줘서 세운 머리에 그에게 너무 
잘 어울리는 검은색 정장과 구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ㅇㅇ.
 
 
....
 
 
..사랑한다.
 
 
...
 
 
나 이런 거 처음 해봐서 잘 못하는데,
 ..받아줄.. 거야?
 
 
...푸흐흐.”
 
 
..ㅇㅇ..?
 
 
그야, 당연하지! 이 바보야!!
 
 
 
처음으로 울다가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서 거세게 
안긴 날, 산책을 하다가 그를 처음 만났던 날처럼 
환하게 빛나는 달빛 아래에서, 나는 경수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뒤로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제 그가 없는 하루하루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너무나도 상냥한 그의 태도와, 마치 공주님을 대하듯이
 해주는 경수.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설레는, 그의 미소
아침에 그의 얼굴을 시작으로 하루를 보내면 묵었던 
피로가 씻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경수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뭔가 이상했다
경수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묘하게 소름끼치는
 그의 행동과 말투, 모습들. 평소에는 정말 다정하고
자상한 경수인데, 어느 특정한 상황만 되면 사람이
 바뀐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경수는 이상해진다.
 
 
 
ㅇㅇ, 우리 오랜만에 영화나 보러 갈까?
 
 
.. 미안,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 ...?
 
 
선약이 있어서.. 이해해 줄 수 있지?
 
 
...누구랑?
 
 
"그게..."
 
 
...? 말해 봐, 누구냐고.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고등학교 친구들? ...남자있어?
 
 
...1, 근데 알잖아, 난 너 밖에 없는 거
걔도 여자친구 있어. 그리고..
 
나보다.. 그 자식이 더 소중한가보네, 여주는.
 
 
"경수야.."
 
 
이제.. 너도 날 버리고 가는 거야?
? 평생 같이 있자며.
 
 
"아니야, 경수야...!"
 
 
너도.. 너도 똑같아!! 다른 사람들이랑 똑같아!! 
너마저, ...!
 
 
경수야...! 아니라니까..! 하아.. 알았어
그냥 약속 취소할게. 됐지?
 
 
...
 
 
..경수야.”
 
 
..그래, 좀 있다가 너 집으로 갈게. 사랑해."
 
 
 
그 특정한 상황이란, 경수가 나를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생각이 들 때다. 처음에는 남자 특유의 귀여운 집착이나
 독점욕으로 받아줬지만, 경수의 집착은 일반 남자의 
것과는 달랐다. 단순한 집착이 아니라, 극렬한 분노마저 
일으키는 경수의 독점욕은 도저히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없었다. 내가 다른 남자와 만난다는 
그 자체가 경수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주변 친구들은 그런 남자랑 얼른
 헤어져버리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경수를 떠날 수 없다.
 
 

 
..ㅇㅇ, 사랑해.
 
 
...나도.
 
 
..너는 나 안 버릴 거지? ? 나 혼자두지 않을 거지?
 
 
..그럼, 당연하지. 내가 왜...
 
 
 
항상 그렇듯이 밤이면 내 침대로 와서 나를 구속하듯이
 감싸 안는 경수, 그리고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나. 경수는, 지독한 애정결핍이 분명했다
아마 어릴 적에 무슨 상처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직 나는 경수의 어릴 적 사정까지 알아낼 수 없다
어렸을 때 이야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애인인 나에게조차. 그런데, 문제는 점점 더
 커져갔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경수와 나의 관계가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경수의 이면에 잠들어 있던 
모습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집착의 단계를 넘어서, 나를 완전히 구속시키려 
하고 있었다.
 
 
 
ㅇㅇ가 나만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이 눈이, 이 코가, 이 입이, 이 몸이 오직 나한테만 
만져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깝다.
 
 
 
내 위에서 무미건조한 말투로 소름 돋게 중얼거리는 
경수를 볼 때면, 나는 이제 두려움이 더 앞서기 
시작한다. ..이제 피곤하다. 지친다
자상하고 상냥한 경수와, 마치 다른 사람인 것 마냥 
행동하는 또 다른 경수. 마치 두 사람이 한 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이제 경수는
 감정의 전환이 너무도 극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지치기 시작했다.
 
 
 
"ㅇㅇ, 나 버리지마."
 
 
"..."
 
 
"이 세상에서 난 너만 있으면 돼, 알았지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나 너 사랑하는 거 알잖아."
 
 
"...."
 
 
"..? 대답 좀 해봐."
 
 
".., 나도 너 사랑해."
 
 
", 나도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어준다
똑같은 패턴이다, 그의 달콤한, 마치 마약과도 같은 
중독성을 지닌 환한 미소에 넘어가서 또 다른 그를 
잊어버리는 나. 금방이라도 부서져서 깊은 강바닥으로
 떨어질 듯한 외나무다리처럼, 그와 나의 위험하고도 
위태로운 관계는, 1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었다.
 
 
 
 
ㅇㅇ...
 
 
...
 
 
ㅇㅇ... ㅇㅇ... 문 좀 열어봐.. 제발..
 
 
...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문 좀 열어줘.
나 너 없으면 못 사는 거 알잖아..
 
 
...
 
 
흐윽... ... ㅇㅇ야아.. ㅇㅇ..
 
 
 
 
결국 경수의 도를 넘어서가는 집착을 견디지 못한 
나 때문에 몇 번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경수는 나에게 간절하게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어쩔 때는 우리 집 현관 앞까지 찾아와서 하루종일 
문을 열어달라고 울부짖었던 적이 있었다
결국 옆 주민의 신고로 경비원아저씨가 찾아오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다시 받아들였지만
내 마음은 경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수야...
 
 
 
경수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착하고, 자상하고
귀엽고, 진지하다. ..그렇기에 더 무섭다
아직도 내가 완전히 모르는 경수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경수의 집착은 
내 일자리에서도 계속되었다. 시나리오 검토를 받는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인지라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야하는데, 그럴 때마다 경수는 내 일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경수가 내 일자리에 
직접 찾아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상황이 안 좋았다.
 
 
 
 
ㅇㅇ? 내가 몇 번 말했어요
이런 진부한 소재로는 안 된다니까!!”
 
 
죄송합니다..
 
 
“...진짜, 글밖에 못 쓰는 글쟁이면
 이런 거라도 잘 해야지, 짜증나게..”
 
 
...죄송합니다, ? 경수야.. 바보야, 여긴 왜 왔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카 프라프치노와 프레첼을
 사들고 나를 찾아온 경수. 그러다가 나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광고주를 우연히 본 경수는, 이상하게 그날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광고주에게 눈에 불을 
고 죽이려 들 것이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경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경수야..
 
 
..ㅇㅇ, 괜찮아?
 
 
.. , 난 괜찮아. 이정도로는 끄떡없어.
 
 
..내가 지켜줄게.
 
 
경수야..?
 
 
ㅇㅇ, 내가 지켜줄 테니까.. 더는 걱정하지 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싸늘하게 식은 무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나에게 조용하게 말하는 경수. 나는 말없이
 그에게 안겼다. 생각보다 경수의 얌전한 반응에 
안심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됐다
나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던 광고주가 그 다음 날부터 
팅에 참석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 광고주님은 오늘 안 계세요..?
 
 
그게, 이상하게 오늘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되세요
아직 주무시는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네
종인이형, 광고주님 아직도 연락 안 돼요?”
 
 
, 이상하네. 이따가 내가 직접 찾아가볼게.”
 
 
....!!!
 
 
그보다 ㅇㅇ, 이 콘티 꽤 괜찮은데요? 이걸로 합시다
좀 더 다듬으면 신선할 거 같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종인이형, 미진 씨랑 종환 씨도
 오늘 출근 안 했던데, 확인 해봤어?”
 
 
? 걔는 또 왜? 나 참, 대체 무슨 일이야.”
 
 
“...”
 
 
미진 씨라면, 분명히 내가 써온 시나리오를 보고 삼류 
같다며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던 사람이고, 종환 씨는
 내 허리를 기분 나쁘게 살짝 쓰다듬었던 적이 있는
직장 상사다. 나는, 그 날을 시작으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에게 짜증을 내거나 성희롱을 
한 사람들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연락 두절이라니, 직원들에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지만 아무도 그들의 행방을 몰랐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 우연히 어딘가 아파서 모두
 입원해있거나 그런 거겠지. 나는 비겁하게도 진실을
 알기 두려워서 숨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의
 진상을 아는 것이 너무나 무서워서
하지만, 9시 뉴스를 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긴급 속보입니다, OO시 강진대교 하류에서 의문의 
변사체가 무려 3구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조사팀이
 긴급 투입되고 현장은 혼란 속에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변사체들은 모두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서, 신원을 확인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변사체들이 발견된 것은 어젯밤 10, 산책을 하던 
50대 중년 남성이 하류에서 풍기는 악취의 근원지를
 찾아가다가 시신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조사팀은 이번 사건을 의문의 묻지마 살인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범인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
 
 
 
묻지마 살인, 일주일 전부터 출근하지 않는 광고주
미진 씨, 종환 씨. 나는 TV 전원을 끄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경수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나는 경수에게 전화를 했다, 3초도 
지나기 전에 경수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두려움이
 묻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경수야..
 
 
, ㅇㅇ. 무슨 일이야?
 
 
혹시.. 뉴스.. 봤어?
 
 
뉴스? 무슨 뉴스 말하는 거야? , 혹시 동계 올림픽?
 
.. 그게... 하아, 아무것도 아니야. 저녁은 먹었어?
 
 
 
그래, 아니겠지. 설마 경수가. 나는 묻지마 살인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어째선지 그 3명이 지속적으로 출근하지 않는 
그 회사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집 안에서만 지낼 뿐 이었다. 타인과 만나는 걸 
최소로 하고, 고양이 용품이나 사료를 사러 가거나 
인터넷으로 원고만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오로지 부모님 혹은
 경수 둘 중 하나였다. 경수는 이런 나의 생활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 했다.
 
 
 
ㅇㅇ, 왜 이렇게 말랐어.
밥 제대로 먹고 있는 거 맞아?
 
 
.. , 그냥.. 입맛이 없네.
 
 
그럼 안 돼지, 잘 챙겨먹어야 돼
오늘은 내가 저녁 만들어 줄게.”
 
 
 
내게 저녁을 만들어준다고 서투른 솜씨로 칼질을
 해가며 김치스파게티와 볶음밥을 만들어준 경수
나는 경수에 대한 의심을 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이렇게나 나를 생각해주는 경수인데, 나쁜 생각을 
했던 내가 싫어졌다. 그렇게, 한동안 경수와 나 둘 만의
 시간이 지속되었다. 경수는 내가 자신밖에 만나지 않는 
이 상황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경수의 차분한 모습이 지속되었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그런데, 어느 날, 경수가 느닷없이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당분간 우리 집에 올 수 없다는 연락을 해왔다
 밖에서 계속 나가지 않던 나에게는 상당히 괜찮은
 소식이었다. 아직까지 변사체의 범인을 찾지 못한 
상태라 바깥에 나가는 게 어째선지 불안했기 때문이다
내가 용의자로 지목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더욱 그랬다. 혹시 어쩌면, 나 또한 그들과 
똑같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괜찮아.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새로 산 옷을 입고 구두도 
신은 채 바깥으로 나갔다. 시험 삼아 원고를 보냈던
 한 광고 회사의 제작팀에서 아주 드물게도 러브콜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수가 없자 일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풀렸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지날수록 일의
 성과는 급속도로 발전해가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만난
 광고주가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대로 간다면 일은 성공적으로 풀릴 것 같았다.
 
 

 
ㅇㅇ , 내일 시간 돼요? 좀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그런데.
 
 
 
광고주 박찬열, 키 크고 잘 생기고 옷빨 좋은데다가
 일까지 완벽하게 잘하는 이른바 완전무결한 남자
하지만 나에게는 이미 경수가 있기에 나는 항상 그를
 사무적인 태도로 대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오히려 
역으로 호감이 생겼는지 박찬열은 미팅 당일 손 안에
 들린 콘티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본 채 말했다.
 
 
"ㅇㅇ , ㅇㅇ 씨한테 관심 있어요."
 
 
"....!? ?"
 
 
"사귀자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저랑 밥 한 번만 먹어요. 안 돼요?"
 
 
 
만약 여기서 거절한다면 이번 광고는 꼼짝없이
 날아가 버리겠다고 위기감을 느낀 나는 결국 경수 몰래,
어쩔 수 없이 딱 한 번 만이라고 그에게 으름장을 놓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박찬열과 밥을 먹기로 한 날 저녁,
대충 나갈 준비를 마친 나는 경수에게 전화가 온 것을
 보고 잠시 고민한 뒤 결구 전화를 받았다.
 
 
 
", ㅇㅇ. 뭐 해?"
 
 
".. 경수야. 나 지금 저녁 먹으러 나가는 중이야.
 
 
"밥 먹으러 나간다고? ..누구랑. 혼자서?"
 
 
"아니, .. .. 부모님이랑."
 
 
", 부모님이랑. 그래, 알았어. 잘 다녀와
나는 내일이면 다시 돌아갈 것 같아
오늘까지는 혼자 잘 수 있지?"
 
 
"지금 놀리는 거야?"
 
 
"하하, 그럴 리가. 알았어, 밥 맛있게 먹고. 사랑해."
 
 
 
오늘은 경수가 없는 마지막 날. 아주 드물고도 
드문 날이다. 경수가 만약 내가 다른 남자와 밥을
 먹는다는 것을 보게 되면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로서는 도저히 장담할 수 없기에 나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퍼프로 닦아내고는 서둘러 바깥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자, 여느 때와 같이 
길쭉하고 세련된 몸매와 패션을 자랑하는 박찬열이 
주변 여자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힘없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 ㅇㅇ . 왔어요?"
 
 
"하아.."
 
 
"얼굴이 왜 그래요? 피곤해요?"
 
 
"그냥, 잠을 못 자서요."
 
 
", 그렇구나. 난 또 무슨 
사고라도 생긴 줄 알았네, 하하!"
 
 
 
움찔. 내가 약간 몸을 떨면서 반응하자 눈치도 빠른 
박찬열은 뭔가 보통일이 아님을 감지했는지 갑자기 
태도를 진지하게 바꾸면서 내 어깨를 잡고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경수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너무도 자상한 눈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조금 놓아버렸는지도 모른다. 오직 경수만을 
향하고 있던, 구속된 내 마음이.
 
 
 
"ㅇㅇ , 솔직히 말해요, 무슨 일 있죠?"
 
 
"..."
 
 
"아무 일 없기는, 얼굴 보면 그게 아닌데.. 
진짜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추우니까."
 
 
 
밥 대신에 진솔한 얘기를 나누기로 결정한 나와
 박찬열은 근처의 1층 카페로 들어가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을 주문한 뒤 
나는 지금까지 나 혼자서 감추고 있던, 경수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박찬열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나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에 한 번
 놀라고, 경수의 도를 뛰어넘은 집착에 두 번 놀랐다.
 
 
 
"계속 들으니까 그 경수 씨라는 사람
뭔가 이상한데요."
 
 
"...."
 
 
"혹시 이중인격은 아니에요?"
 
 
"...."
 
 
"그 사람,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ㅇㅇ
내가 다른 사심을 품어서도 아니고, ㅇㅇ 씨를 
좋아해서도 아니라 정말 사람 대 사람으로
진지하게 걱정해서 묻는 건데.. 경수 씨와 관계,
정말 괜찮아요?"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경수는 너무나
 좋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무섭다
그의 광기어린 눈을 보고 있을 때면 나에게 미소를 
지어주던 그와 정말 동일인물인지 의심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경수를 사랑하기에 경수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내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박찬열이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니까 좀 낫네.
 
 
 
말을 해서 목이 말랐던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무심코 창가를 쳐다봤을 때, 나는 손 안에 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닥에 떨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 .. 아아.."
 
 
"ㅇㅇ !? 왜 그래요!?"
 
 

 
카페의 유리창 너머 바깥에는,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경수가 차에서 내린 상태로, 나와 박찬열이 있는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어떻게 경수가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히 내일 돌아온다고 했는데..! 나는 두려움에 패닉
 상태가 되었다. 다리가 공포에 후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새빨간 장미꽃다발이 그의 손에 
쥐어져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만든 자책과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 경수야..
 
 
 
그보다 박찬열을 바라보는 경수의 저 눈
저번에 나에게 화를 내던 광고주를 보던 눈과 똑같다
이곳으로 달려와 화를 내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일 없이
 그저 이곳을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무감정한 눈길이
오늘따라 너무 무섭다. 내가 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바들바들 떨자, 박찬열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몸을 감싸며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무섭다
너무 무서워. 경수가, 이 곳을 경수가 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까 너무 무서워서 몸이 진정되지를 않는다.
 
 
 
"...."
 
 
"ㅇㅇ, 진정해요. 정신 좀 차려 봐요..!"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며 박찬열이 다정한 행동을
 할수록, 내 안의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박찬열에 대한 호감, 고마움과 경수에 대한 
미안함, 두려움, 공포,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어이없음까지. 여러가지 것들이 한데 뒤섞여서 끔찍한
 불협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자
거짓말 같게도 경수는, 없었다. 사라졌다.
 
나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와 똑같이 칠흑 같은 검은 
수트를 입고 한 손에는 장미 꽃다발을 든 채 나를 
말없이 바라보던 경수. 설마 내가 환상이라도 본 건가
 싶어서 눈을 비볐지만, 그는 정말로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정말 헛것이라도 보게 된 걸까.
 
 
 
"...하아.."
 
 

 
"ㅇㅇ, 진짜 괜찮아요? 병원 갈까요?"
 
 
 
제발, 부탁이야. 나한테 관심 갖지 마. 박찬열 또한 
무사할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다. 귀를 막은 
 비명을 질렀다. 고요하던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자, 박찬열은 당황하더니 이내 나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시간이 지나고 내 패닉
 상태가 어느 정도 호전되자, 박찬열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말했다.
 
 
 
"ㅇㅇ, 그 남자랑 만나는 거, 그만 둬요."
 
 
".. 안 돼요.. 경수는.. 내가 없으면...!"
 
 
...ㅇㅇ.."
 
 
 
박찬열이 나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는, 나와 경수는 단단히 어긋나있다
마치 크기가 안 맞는 태엽들이 맞물린 것처럼
그렇게 멍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모르겠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경수야, 경수야. 경수의 이름을 
주문을 읊조리듯이 중얼거리다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너무도 달콤하고 어두운 잠이었다. 그리고 눈을 뜨자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3시가 되어있었다.
 
 
 
...화장도 안 지우고 잤네.
 
 
야옹.”
 
 
아유, 알았어, 밥 줄게.
 
 
 
밥 달라고 우는 고양이를 보고 웃으며 말하고 있을 때
핸드폰에 경수의 메시지가 도착해있음을 본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서둘러 누가 뺏어갈세라 핸드폰을 집어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동영상이 올라와있었다
..이게, 뭐지?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 동영상을 
다운 받았다. 5분 정도 되는 길이의 짧은 동영상이었다
그리고 다운로드가 완료되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나는 핸드폰을 집어던지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그만해!! 그만!!
 
 
 
짧은 순간 본 동영상 속에는, 의자에 묶여있는 
상태의 찬열 씨 주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경수가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의 소리를 꺼버리고 싶었지만,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찬열 씨의 고통에 담긴 악에 찬 비명소리와 
불이 붙어서 불타오르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찬열 씨의 목소리와 불타는 소리는 손을 뚫고 
귀로 들어왔다. 그만, 그만해. 경수야. 너 이러면 안 돼
너 진짜 미쳤다고. 도경수.
 
 

 
흐윽... 흐흑...
 
 
ㅇㅇ, 내가 너한테 달라붙던 징그러운 놈
 하나 처리했어, 잘 했지? ?
 
 
화르르르륵--’
 
 
넌 언제나 내가 지켜준다고 했잖아.
 
 
크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
 
 
.. 구도 널 건드릴 수 없게
내가 지켜준다고 했어. ..내가.
 
 
 
경수의 작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동영상이 종료됐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아주 지독한 악몽인 게 
틀림없어. 나는 경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야가
 아득해지는 게 느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뒤, 나는 눈을 감았다
경수가 생각나는 짙은 어둠이 시야를 덮쳐왔다.
 
 
 
...
 
 
..ㅇㅇ, ㅇㅇ.
 
 
...?
 
 
잘 잤어? 피곤해 보인다.
 
 
경수..?
 
 
 

 
 
눈을 다시 뜨자, 내 침대에 경수와 나는 함께 누워있었다.
 .... 인가? 바깥을 보니 낮이 되었는지 밝은 햇살이
 방 안에 들어와서 빛을 밝히고 있었다. 내 안색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이 말하는 경수. ...대체, 뭐였을까
그건. 정말 꿈이었나? 나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악몽을 꿨다고 경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경수는 
걱정스러운 듯 내 볼을 감싸며 말했다.
 
 
 
진짜? 요즘 잠을 잘 못 잤나보네. 어떡하지
우리 ㅇㅇ. 그래도 이뻐.”
 
 
....
 
 
밥 먹자, 내가 다 준비해놨어. 차려놓고 있을게.”
 
 
 
준비하고 나오라며 나에게 방긋 웃어준 경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
경수가 그럴 리가 없지. 아마 내가 지독한 악몽을 
꿨던 게 틀림없어.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깥으로 나갔다. 고기 굽는 냄새가 주방에 퍼져 있었다
고기라, 정말 오랜만에 먹는다. 나는 식탁의 의자에
 앉아서 요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앞치마를 두르고 
프라이팬에 구운 고기를 내오는 경수. 정말 자상한 
남편감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맛있겠다며 박수를 쳤다.
 
 
 
많이 먹어,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머, 이건 대체 무슨 고기야?
식감이 처음 먹어보는 고기 같아.
 
 
..이거? ..그냥, .. 소고기.
 
 
..?
 
 
 
소고기인데 부위는 나도 잘 모르겠다며 경수가 
웃으면서 말하자,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런데 먹다보니 왜 이렇게 속이 안 좋지
내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속이 안 좋다고 말하자
경수는 소화제를 사오겠다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야,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안 돼, 너 아프면 내가 힘들어. 기다리고 있어.
 
 
나 참..
 
 
 
손을 흔들며 얼른 갔다 오겠다며 신발을 구겨 신고
 나간 경수에게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속이 안 좋아져서 고기가 안 들어가자 나는 
가슴을 퍽퍽 쳤다.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지
고기라면 죽고 못 사는 나인데. 설마 고기를 먹다가
 체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 때, 나는 주방의 
가스레인지 바로 옆에 검은 비닐봉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지?
 
 
 
경수가 말했던 그 고기인가?
 
 
 
대체 무슨 고기인지 궁금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검은 비닐봉지 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세게 묶어놨는지 
꽁꽁 묶여서 도저히 풀리지가 않았다
결국 힘으로 뜯어내고 나서야 나는 비닐봉지 
안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그리고 비닐봉지 안의 고기를 확인한 순간
나는 그 즉시 싱크대에 내가 먹었던 것을 모조리
 다 토해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토해낼 것도
 없어서 위액까지 나올 수준까지 토하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열어본 검은
 비닐봉지의 안에는-
 
 
 
미안, 마트가 문을 닫았네, ..? ㅇㅇ..?
너 왜 그래?
 
 
.. 도경수.. ...
 
 
...봤구나.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검게 탄 인간의 발과 작게
 조각난 그을린 신체 부위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꿈이, 아니었어.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버렸다. 도경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공포로 변해갔다. 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경수가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서 내 무릎 위에 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잔혹한 행동을 한 것과는 
상반되게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 ...
 
 
...그저 꿈으로 남고 싶었으면, 열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 미친 거 아냐!?
 
 
...너도, 내가 이상해 보이니?
 
 
당연하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짓을... ..!!
 
 
 
그 말을 끝으로, 내 등이 바닥에 닿고 목에 압박이
 가해졌다. 숨이 막혀. 경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목을 세게 조여 왔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너무도 순수하게, 잔혹 그 자체인 도경수
의식이흐려진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몸에 점점 
힘이 빠져온다. 내가 본 마지막 그의 모습은
너무도 매력적인 것이여서, 나는 그에게서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 가 없었다. 그는 파랗게 질린 내 입술에
 입을 맞추며, 아주 달콤한 말투로 마지막 말을 
부드럽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앞으로도 내가 지켜줄게.
 
 
커억...
 
 
네가 죽더라도, 난 놓지 않을 테니까.
 
 
.. ...
 
 
잘 자.
 
 
 
도경수는 손에 힘을 더욱 가했다. 잠시 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지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끅끅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애인을 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꾸만 뒤로 넘어가려고 해서 무거웠지만
경수는 애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나른하게 말했다.
 
 
 
사랑해.
 
 
 
........
 
 
 
 
 
또 다시 긴급 속보입니다. 어젯밤 11시 경
경기도 외곽의 한 공사장에서 불에 탄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20대 중반의 남성으로
 추정되며, 또 조사 결과 시신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어 이 역시 묻지마 살인의
 연쇄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건의 진범은, 대체 누구일까요
아직까지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조사반은 수사에 더욱 더 압력을 가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 또 다시 긴급 속보입니다.
경기도 OOOO아파트에서 의문의 연쇄 사건의 
피해자로 추정되는 시신이 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피해자의 심장이 사라진 상태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요, 조사반은 외부의 압박으로
 인한 질식사로 추정...
 
 
 
...
 
 
 
밤하늘 위 하얀 달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눈부셔서
마치 전등이 머리 바로 위에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밝은 밤. 한 공원에서 어떤 남자가
 쭈그려 앉은 채 고양이를 만지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양이는
앞쪽 발이 잘려있는 상태였다.
 
 
 
한참이나 고양이를 만지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고양이, 좋아하세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END.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프로크루스테스는 여인숙을 차려 놓고 손님이
 들어오면 집 안에 있는 쇠 침대에 눕혔다
쇠 침대는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가 있었는데,
키가 큰 사람에게는 작은 침대를 내주고 작은 
사람에게는 큰 침대를 내주었다. 그래서 키가 침대보다 
커서 밖으로 튀어나오면 침대의 크기에 알맞게 머리나 
다리를 톱으로 잘라내고, 작으면 몸을 잡아 늘여서 죽였다
테세우스는 이 악당의 여인숙에 들어가서 그를 똑같은 
방식으로, 침대 밖으로 튀어나온 머리를 잘라서 죽였다.
 
 
요즘에도 일상 언어에서 자주 쓰이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표현은
 이 신화에서 유래하였다
자신의 원칙이나 기준을 막무가내로 고집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는
 폭력적이거나 극도로 융통성이 부족한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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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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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이 : 탄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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